MAX SPORTS MOVIE | 88 올림픽의 이면, 응답하라 1988

2016-08-16 00:00 디지털콘텐츠팀 기자

[맥스무비= 디지털콘텐츠팀 기자] 1988년 열린 24회 서울올림픽은 당시 어려운 시절을 관통하고 있던 대한민국 국민에게 묵직한 자긍심을 안겨줬다. 하지만 성대하고 화려한 모습으로만 기억하기에 1988년 축제 바깥의 실상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88 올림픽의 여집합인 1988년을 들여다봤다.

이명세 감독 <개그맨>
이명세 감독 <개그맨>

아마 잘 상상이 안 되겠지만 1988년 그해는 민심이 흉흉했다. 전 세계로 중계 방송되는 ‘단군 이래’ 첫 번째 행사를 앞두고 있었지만 아무 것도 잘 되어가지 않고 있었다. 올림픽 전해에 박종철은 고문으로 죽었고 이에 항의 시위하던 이한열이 죽었다. 젊은이들이 끊임없이 죽었다. 1987년 6월 시민항쟁이라는 자랑스러운 승리가 있었지만 그런 다음 정작 투표로 당선된 대통령은 노태우였다. 그 결과 앞에서 갑자기 사람들은 냉소적으로 바뀌었다. 자기 손으로 해낸 승리. 그런 다음 자기 손으로 저지른 실수. 그해 8월 29일 오대양이라는 사이비종교단체의 신도 32명이 집단자살 시체로 천장에서 발견됐다. 이 죽음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노태우 대통령은 정치적 제스처로 5공 청문회를 개시했지만 재판을 받아야 할 당사자는 이듬해 88년 올림픽을 구경한 다음 그해 겨울 백담사에 은둔했다. 나는 지금 조선시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1988년 한 해 동안 만들어진 한국영화는 모두 88편이었지만 약간 신기하게도 그 중 단 한 편도 스포츠영화는 없었다. 아마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한국영화에는 스포츠영화라는 장르가 만들어진 적이 거의 없다. 아마 21세기에조차 <국가대표>(2009)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7)을 제외하면 인상적인 스포츠영화가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때 한국영화는 CG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 해에 모든 제작자들과 프로듀서들은 의욕상실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올림픽이라는 구경거리가 있는데 집에서 편안하게 텔레비전을 보지 누가 극장에 영화를 보러 오겠냐는 것이다. 대부분 이 생각에 완전히 동의했음에 틀림없다. 그럴 때는 돈을 쓰지 않는 게 돈을 버는 길이다.

하지만 그해에 정말 중요한 세 명의 신인감독이 동시에 첫 번째 영화를 찍었다. <개그맨>의 이명세, <칠수와 만수>의 박광수, <달콤한 신부들>의 강우석. 한국영화를 주의 깊게 바라보던 일부 서방세계의 영화저널들은 이 영화들이 등장한 1988년을 ‘첫 번째 코리안 뉴 웨이브의 해’라고 불렀다. (두 번째 해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홍상수, <악어>의 김기덕, <은행나무 침대>의 강제규가 데뷔한 1996년이다.) 물론 이들은 하나로 묶일만한 어떤 공통점도 없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영화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쌓았으며 그들이 가고자 한 길도 달랐으며 그들이 목표로 삼은 영화적 비전도 달랐다.

박광수 감독 <칠수와 만수>
박광수 감독 <칠수와 만수>

명백히 박광수 감독은 이전의 충무로 제도권 영화들로부터 거의 영향 받지 않았다. 그가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다음 일시적으로 이장호 감독의 밑에서 연출부를 했지만 처음부터 그 둘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었다. <칠수와 만수>는 대만 작가 황춘밍의 단편소설 <두 페인트공>을 각색해 무대에 올린 연우무대의 (그 당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장기공연을 하며 공감을 모은) 동명의 희곡을 영화로 옮긴 작품이다. 박광수 감독은 연우무대에 잠시 동안 몸을 담았지만 영화에 연우극단의 배우를 동원하지는 않았다. (그때 칠수 역을 하던 배우는 문성근이었다.) 그 대신 안성기와 박중훈을 주연으로 (그 당시로는) 아무도 그렇게 오랫동안 화면을 멈춰본 적이 없는 롱 테이크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그래서 촬영 현장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유영길 촬영감독과 불화 끝에 일부 장면을 박광수 감독이 직접 찍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그런 다음 두 영화인은 영화를 보고 화해했고 그 이후 유영길 촬영감독은 고인이 될 때까지 박광수의 모든 영화를 찍었다) 이 영화는 동시대의 영화들 속에서 한국영화라기보다는 허우 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으로 설명되는 대만영화의 ‘신랑차오(New Wave)’에 더 친근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강우석 감독 <달콤한 신부들>
강우석 감독 <달콤한 신부들>

반대로 강우석 감독은 처음부터 자신이 준비된 충무로 상업영화 감독이라는 걸 <달콤한 신부들>에서 과시한다. 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이 영화는 다소 괴이할 정도로 미학적 야심이 전혀 없다. 그렇다고 농촌총각이 도심에 와서 신부를 구하는 이 애절한 이야기에 사회 비판의식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대신 오직 보는 쪽을 감정적으로 동요시키기 위해 그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기술이 동원되다시피 한다. 그게 너무 절실해서 처음에는 우스꽝스러워보이던 이 영화가 마지막 순간에 이상한 방식으로 그 과잉하는 정념을 통해서 보는 쪽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그때가 다가오면 세련된 영화의 취향을 갖고 있던 시네필은 당황하고야 말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단지 이야기가 감정을 쥐어짜거나 주인공들이 눈물을 흘리는 대신 영화가 자신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 것이다. 오히려 현재의 강우석 감독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그때의 강우석이 가졌던 저 절실한 태도로 되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 다음 이명세 감독, 그렇다, 그저 괴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명세가 그 해에 나타났다. 심지어 <개그맨>은 지금 다시 보아도 이 사람이 어쩌자고 이렇게 시작했을까, 하는 그 무모함에 어리둥절해질 지경이다. 자신이 모셨던 감독 배창호가 안성기, ‘미녀’ 황신혜와 함께 삼인조로 등장하는 이 영화는 줄거리를 정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명세는 자신이 자라나면서 (시네마테크가 없었던 탓에) 텔레비전으로 두서없이 본 명화극장의 경험을 한 편의 영화 안에 닥치는 대로 쏟아 붓다시피 했다. 그냥 이렇게 말하는 편이 편하다. 영화 자체가 좌충우돌하면서 하여튼 앞으로 맹렬하게 돌진하기 시작한다. 분명히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 영화 자체가 산산조각 날 게 뻔한 데도 마치 잠시라도 멈추면 탈선하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게 달려간다. 아마 현장에서 이렇게 막무가내로 밀고 나아가는 조감독 출신의 이명세를 보면서 스승인 배창호는 간담이 서늘했을 것이다. 자기가 해본 적이 없는 영화, 아니 꿈도 꾸어본 적이 없는 영화.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 갑자기 당신은 내게 물어보고 싶을 것이다. 자, 알겠어요. 하지만 1988년 그해에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진 박스오피스 1위 영화는 무엇인가요? 사실 그때에도 모두들 궁금하게 생각했다. 언론은 한국사회가 세계적인 행사를 치루고 나면 자신감을 갖게 될 것이며 문화적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돼 좀 더 깊이 있고 품위 있는 성숙함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해 1위를 한 영화는 올림픽이 끝난 직후 11월에 중앙극장에서 개봉한 엄종선의 <매춘>으로, ‘충무로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영화는 제목만큼이나 영화도 천박하기 짝이 없는 끔찍하고 참혹한 졸작이다. 하지만 그게 우리의 ‘문화적 성숙함’을 적나라하게 외설적으로 보여주는 현실이었다. 올림픽은 잠시 동안의 착각이었다. 행사는 끝났고 세상은 재빨리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 이듬해 증시는 역대 최악의 폭락을 경험해야만 했고 더 나쁜 것은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고 여당과 야당을 합당하는 황당무계한 정치적 난장판을 연출했다. 그저 구경하려고만 든다면 현실이 영화보다 훨씬 흥미로운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그해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고 한다.

정성일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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