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무비= 차지수 기자] <브이아이피>가 첫 악역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새도 없을 만큼 이종석은 늘 새로웠다. 그 바탕에는 카메라 앞에서 완벽히 진솔하고자 하는 이종석의 뜨거운 갈망이 있었다.

시나리오보다 영화가 훨씬 재밌게 나왔다고 배우들이 좋아하던데요?
사실 박훈정 감독님한테 영화를 미리 보여 달라고 했는데 아쉽게도 못 봤어요. 긴장하고 있었지만, 확실히 시나리오로 볼 때보다 더 재밌게 나온 것 같아요. 영화가 챕터로 나뉘어 있고 설명적인 대사가 많잖아요. 글로 읽었을 땐 캐릭터의 관계가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연출과 연기를 입히니까 색다른 느낌이 들더라고요.
첫 악역이라 자기 모습이 유난히 더 궁금했겠어요.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 완전히 다른 캐릭터니 걱정이 좀 됐죠. 제 캐릭터가 모두의 분노를 사야 하는데 ‘혹시나 약해보이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연기하기 전에 준비를 이것저것 많이 해갔는데, 감독님이 많이 걷어내셨어요. 덕분에 자칫 과해질 수 있었던 것들이 담백해졌죠.
북한 출신 캐릭터는 <코리아>(2012) <닥터 이방인>(SBS, 2014)에 이어 벌써 세 번째여서 부담이 덜 하진 않았나요?
두 번의 경험이 있어서 북한 사투리가 굉장히 자신 있었는데, <브이아이피>에서는 감독님이 북한과 남한의 중간 말투를 쓰라고 하셨어요. 김광일 캐릭터는 북한보다 해외에서 생활한 시간이 많다는 설정이었어요. 실제로 북한 고위층 자제들은 유학을 많이 가고, 해외에서 굉장히 세련되게 하고 다닌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점을 반영하느라 김광일의 톤을 잡는 데 좀 애를 먹었죠. 공기 반 소리 반에, 뉘앙스도 남북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도록 연기했어요.
<브이아이피> 현장에서 평소와 다르게 질문에 적극적이었다고 들었어요. 어려운 게 유독 많았던 영향인지 아니면 준비하는 스타일에 변화가 생긴 건지 궁금했어요.
제가 원래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는 걸 잘 못해요. 전에 <관상>(2013) 촬영할 때는 선배님들이 참 많았는데도 용기를 못 냈어요. 나중에 많이 후회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엔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고자 선배님들한테 조언을 구했죠. 특히 장동건 선배님은 참 다정하고 젠틀하셨어요. 원래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고 들었는데 저한테 먼저 다가와 주시고, 참 따뜻하게 대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이 커요.

김광일은 살인을 즐기는 사이코패스 캐릭터죠. 전형성을 탈피하고자 노력 많이 한 것 같아요.
배우들이 연기에 앞서 캐릭터의 전사를 만들곤 하는데, 김광일은 그게 불가능했어요. 다른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어떤 인물인지 어렴풋이 유추할 뿐, 공감하기도 어렵고 공감해서도 안 되는 인물이니 어떻게 연기할지 난감했죠. 김광일은 모든 사람이 자기 발밑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누군가와 길게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잖아요. 별다른 대사 없이 다른 캐릭터들과 대치하면서도 기 싸움에서 밀리지 않아야 하는 게 어려웠어요. 그래서 감독님한테 제 몸을 맡겼어요. 세상에 그렇게 미소의 종류가 많은지 몰랐네요.(웃음)
사실 프롤로그의 잔혹함 때문에 충격을 좀 받았어요. 연기하기 가장 어려운 신 아니었나요?
프롤로그 장면이 첫 촬영이라 일단 긴장을 많이 한 상태였는데 피까지 너무 많이 봐서 그런지 촬영이 다 끝나고 난 후에도 한참을 멍 때리고 있었어요. 속도 안 좋고, 머리가 ‘띵’ 하더라고요. 다 소품이고 설정인 걸 알면서도 이렇게 힘든 경우는 처음이었어요. 그래도 이런 장면이 있다는 걸 알고 영화를 봐서 그런지, 볼 때는 좀 덜했어요. 그런데 리뷰 기사들을 보니 잔인하다는 평도 많고, 호불호가 갈리는 것 같아요.
배우들이 다양한 변신을 꿈꾸긴 한다지만, 너무 센 캐릭터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나요?
<브이아이피>가 개봉하고 9월에 <당신이 잠든 사이에>(SBS)라는 멜로드라마가 방송되거든요. 그 드라마에서는 또 완전히 다른 캐릭터인데, <브이아이피>의 영향으로 제 미소가 섬뜩해 보일까봐 걱정하긴 했어요. 잔상이 짙으면 몰입이 안 될 테니까요.
그래도 제일 우선한 건 연기적인 욕심이었죠. 항상 물음표가 있었어요. ‘과연 내가 가진 소년 같은 이미지로 누아르 장르를 소화할 수 있을까? 내가 인상 쓰고 담배 물고 있으면 위압감이 들까?’라는 고민이었죠. 그런데 이 작품은 제 이미지 그대로를 무기 삼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지금까지 나온 사이코패스들과는 다르게 아이 같고, 해맑은 얼굴을 쓸 수 있었으니까요.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 둘 중에 어느 쪽을 선택하는 편인가요?
하고 싶은 쪽이요. 물론 이질감이 심할 것 같으면 망설이긴 하는데, 대체로 결국 하고 싶은 걸 하게 돼요. 영화 <피 끓는 청춘>(2014)을 한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대가 심했어요. 당시 <너의 목소리가 들려>(SBS, 2014)를 막 끝냈을 때였는데, 드라마가 잘 돼서 저도 사랑을 많이 받을 때였거든요.
왜 이 타이밍에 잔뜩 망가져야 하는 코미디 영화를 하느냐고 만류가 많았죠. 하지만 저는 그때도 연기적 욕심이 더 우선이었어요. 대본을 굉장히 재밌고 봤고, 이종석이 이런 연기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지금 생각해봐도 <피 끓는 청춘>이 저의 ‘인생 연기’인 것 같은데요?(웃음)
<학교 2013>(KBS2, 2012)을 시작으로 출연하는 드라마마다 인기를 누렸어요.. 작품 보는 눈이 남다른 데, 슬럼프에 빠진 적은 없었나요?
<닥터이방인>을 할 때 심했죠. 5부까지는 잘한 것 같은데, 어느 순간 제 자아와 캐릭터의 자아가 부딪히기 시작했어요. 배우라면 연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야 하는데, 캐릭터가 원하는 방향대로 가는 것이 너무 힘들더라고요. 기술적으로만 연기하면서 마음이 너무 불편했어요. 그래서 이 작품 끝내고 좀 쉬자고 생각했죠. 그런데 쉬면 아주 오래 쉴지도 모른다는 겁이 나더라고요. 그때는 연기하는 것 자체가 겁이 났던 것 같아요.
바로 이어서 <피노키오>를 하고, 이후 <W(더블유)>를 할 때까지 1년 정도 쉬는 기간에 좀 회복이 됐나요?
그때 계속 괴로워하면서 집에 있었어요. 평소에 드라마 보는 걸 좋아하고, 집에서 혼자 남자 주인공 대사 따라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 기간엔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간이 좀 아까워요. 아, 그 때 중국 드라마를 하나 찍고 왔거든요? 중국 배우들은 연기에 대해 심각하고 철학적인 고민을 하진 않더라고요. 그냥 일로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이 더 강했는데, 저는 그런 모습이 좀 낯설다 보니 다시 빨리 한국에 가서 작품을 하고 싶어졌어요. 마침 <W> 대본을 재밌게 보기도 해서 복귀하게 된 거죠.

보기보다 완벽주의고 진지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모든 것 하나,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너무 잘 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사실 괜찮을 텐데, 혼자 막 괴로워할 때가 있어요. 다른 사람이 봤을 땐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연기 하나도, 그게 거짓말 같으면 자책해요. 그런 마음이 들면 어느 순간 얼굴이 빨개져요. 그래서 <W>를 찍을 때는 감독님한테 “제 얼굴이 빨개질 때가 있는데, 그래서 그 컷을 못 쓸 것 같으면 다시 찍어도 괜찮다”고 미리 말씀드렸어요. <닥터이방인> 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요즘도 종종 그래요.
이종석은 스타성과 연기력을 겸비한 20대 대표 배우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정작 본인은 마냥 즐기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TV에, 스크린에 제가 나오는 게 너무 좋아요. 촬영할 땐 치열하고 고생하면서 찍지만, 막상 결과물을 볼 때는 엄청난 행복을 느끼죠. 제가 나오는 화면 자체를 보는 게 재밌는 것 같아요.(웃음) 다만 너무 잘 하려는 욕심이 크다 보니까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즐기지 못하게 된 부분은 있는 것 같아요. 그래도 아직까지는, 버틸 만해요.(웃음)
나이보다 훨씬 소년 같고 맑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요. 실제 성격과 대외적 이미지 사이의 괴리감을 느낀 적은 없나요?
동료들이 저보고 애교가 많대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스스로 자기 성격에 얘기할 때는 포장하게 될 수밖에 없으니, 아마 다른 사람들이 보는 제가 진짜겠죠? 제가 어떤지 저도 잘 모르겠는데, 엄마는 “네 아빠랑 똑같다”고 하세요.(웃음) 아빠는 무뚝뚝하신 편이거든요. 저 역시 제가 남자답다고 생각해왔는데,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아닌가 봐요. 그렇다면 ‘남자답다’는 게 뭘까 생각해보니, 또 그걸 모르겠어요.
올해 스물아홉이고 또래보다 늦은 입대를 앞두고 있죠. 제대 후 지니고 싶은 모습이 있나요?
20대 초반에는 서른이 되면 뭔가 드라마틱한 변화가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머릿속에 그려지지가 않아요. 주변에서는 서른 살 되어도, 뭐 별 거 없대요. 한 때는 남자다운 이미지, 선 굵은 느낌을 갖고 싶었던 적 있는데 억지로 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저한텐 동경이 대상일 뿐이죠.(웃음)
<브이아이피>를 통해 얻고 싶은 성과는 뭔가요?
이종석이라는 배우가 연기 욕심이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다면 만족해요. 영화가 흥행하면 물론 좋겠지만, 스코어가 목적이 아니에요. 솔직히 아직 이런 연기를 잘 해내기엔 좀 이른 것 같기도 해요.(웃음) 그래서 겁이 많이 났었는데 오히려 영화를 보고 나니까 속이 시원하네요. 제 연기에 대해 잘했다고 느낄 때가 거의 없는데, 이번엔 ‘괜찮네, 애썼다’는 생각 정도는 들어요. 연기적 욕심으로 덤빈 작품이에요. 많이 봐주시면 좋겠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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