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이아이피> 박훈정 감독 “여성 피해자 설정, 이번 일로 생각 많이 했다”

2017-08-31 00:51 성선해 기자

[맥스무비= 성선해 기자] <악마를 보았다>(2010)를 쓰고 <신세계>(2012)를 연출한 박훈정 감독이 신작 <브이아이피>로 돌아왔다. 북한에서 귀순한 VIP 김광일(이종석)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세 남자의 이야기다. 박훈정의 스릴러에 대한 기대, ‘기획 귀순’이라는 새로운 소재와 연기파 배우들의 합류로 개봉 전부터 이슈의 중심에 섰다.

하지만 <브이아이피>는 개봉과 동시에 다른 이슈에 직면했다. 연쇄살인범 김광일이 여성을 살해하는 오프닝 장면이 논란이 됐다. 해당 장면은 최근 한국 사회에서 공론화되고 있는 ‘여성 혐오’ 이슈와 맞물려 <브이아이피>를 향한 따가운 시선으로 돌아왔다. 영화를 둘러싼 설전에 대해 박훈정 감독이 솔직한 답을 들려줬다.

박훈정 감독은 뜨겁고 끈적한 <신세계> 이후 건조하고 서늘한 누아르를 지향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브이아이피>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박훈정 감독은 뜨겁고 끈적한 <신세계> 이후 건조하고 서늘한 누아르를 지향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브이아이피>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신세계>가 끈적끈적하고 뜨거웠다면, <브이아이피>는 잘 정돈된 건조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변화를 택한 이유가 있었나요? 

남자 영화의 톤과 스타일을 정반대의 지점에서 해보고 싶었습니다. <신세계>는 전형적인 누아르죠. 동양적 정서가 많아 홍콩 누아르에 가까워요. 되게 끈적거리고 뜨겁죠. 흔히 ‘누아르’하면 떠오르는 의리와 ‘브로맨스’가 있어요. 캐릭터도 좀 오버스럽고 과장된 경향이 강해요. 이번엔 같은 누아르 카테고리 안에 있지만 정반대로 차갑고, 서늘하고, 드라이한 톤과 스타일을 해보고 싶었어요. <브이아이피>는 날이 선 냉정한 남자들이 주인공인데, 이들이 만나기만 하면 부딪혀요. 도무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자기 목이 왔다 갔다 하니까. 모든 지점에서 <신세계>와 반대죠. 차갑고 건조한 누아르라고 해야 할까요.

<신세계>의 흥행을 기점으로, 한 분기에 한두 편 꼴로 변주된 누아르가 나왔습니다. 남자 배우들을 중심축으로 세워 설계한 범죄 장르는 이미 경우의 수를 다 보여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창작자 입장에서는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저는 좀 단순한 구석이 있어요. 영화를 보고 재밌으면 별생각이 없는 편입니다. 제가 처음에 <신세계>를 한다고 했을 때 “우리나라에서 누아르는 안 된다”고 엄청 무시와 괄시를 받았어요.(웃음) 그 배우들을 캐스팅 해놓고 투자가 안 될 정도였으니까요. 사실 한국에서는 그전에도 <달콤한 인생>(2005) 같은 굉장히 좋은 누아르 영화가 나왔지만, (흥행이) 잘 안됐어요.

그래서 그때는 '손해만 안 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는데 제가 운이 좋았죠. 저는 지금도 <신세계> 흥행은 얻어걸린 거라고 여깁니다. 그때까지 그런 영화가 없었기 때문에 잘 된 거죠. 그 이후에 누아르 영화가 많이 나왔지만, 저는 그 틀 안에서 또 다른 누아르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봤어요. <신세계>를 했으니 정반대의 누아르를 해보자고 생각했죠.

<브이아이피>의 출발점이 궁금합니다. 기획 귀순이란 소재는 '수지 김 간첩 조작사건'에서 모티프를 얻었나요? 

(모티프는) 여러 가지였어요. 수지 김 사건과 황장엽 귀순 사건, 이한영 피살 사건도 있고, 그전으로 올라가면 더 있죠. 예전에 냉전시대 끝자락일 때는 누군가 탈북하면 ‘귀순용사’라고 부르며 기자회견 같은 이벤트를 만들었잖아요. 처음에는 그런 것에서 착안했습니다. 자료 조사를 하다보니 그 이야기들을 쭉 이어 붙이게 되더군요. 미국이 (북한에서) 모시고 와서 우리에게 맡긴 VIP면 뜨거운 감자인건데. 만약 그가 괴물이라면? 우리의 시스템 안에서 그걸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그럼 어떻게 되는 걸까요? 평소 우리는 약속된 시스템에 살면서 공권력을 믿곤 합니다. 그런데 어찌보면 별거 아닌 개인이 거대한 시스템을 조롱하고 짓밟는 거죠. 그럼에도 우린 명령이 있어야만 뭔가를 할 수 있으니까 굉장히 무기력해지죠. 그게 지금 우리 현실이 아닌가 싶더군요. 쓰면서도 좀 착잡했습니다.

<브이아이피>는 남북을 넘나들며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는 사이코패스 VIP 김광일(이종석)을 축으로,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세 남자의 이해관계가 중심입니다. 러닝타임 내내 인물들의 관계를 팽팽하게 유지하는 게 관건이었을 듯 합니다. 

저는 영화가 최대한 질주하는 느낌으로 달려야 한다고 봤어요. 늘어지면 안 될 것 같았거든요. 어떤 분은 시작부터 '시속 100km로 끝까지 달려버린다'고 하셨는데, 그것도 맞는 이야기 같습니다.

남과 북의 대립에서 오는 긴장감과 미국의 개입은 한국 영화에서 많이 본 구도입니다. <브이아이피>는 어떤 지점에서 차별화를 시키고 싶었나요? 

일단 저는 남북 관계에 미국이 끼어있다는 전제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북한과 미국과 관계에 한국이 끼어있는 거죠. <브이아이피>는 그걸 드러냅니다. 북한과 한국의 관계가 직접적으로 나오진 않지만, 미국과 우리의 관계가 폴(피터 스토메어)과 박재혁(장동건)을 통해 대리적으로 드러나죠. 좌우를 막론하고 우리가 미국에 종속적인 관계라는 것은 대부분 인정하지 않나요?

그간 한국 영화는 북한을 다루게 되면 남북 관계가 주가 되고 거기에 미국의 시선이 들어오곤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브이아이피>가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해요. 미국이 북한에 바라는 것, 북한이 미국에 바라는 것. 그 사이에 끼어있는 게 대한민국이죠. 실제로도 그렇지 않나요? 평양에서는 우리가 아닌, 미국 워싱턴과 바로 이야기하려고 해요. <브이아이피>는 기존 한국 영화가 남북 관계를 다룬 것과 아예 시선 자체가 달라요. 기분 나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현실이죠.(웃음)

<브이아이피>를 서늘하고 건조한 누아르로 만들기 위해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꼭 넣고 싶었지만 포기한 부분도 있나요? 

캐릭터를 과장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감정 등 캐릭터들을 포장하는 요소를 많이 덜어내고, 사건과 상황에 집중했어요. 배우들에게도 처음부터 “이건 사건 중심의 영화다. 캐릭터들은 이 사건에 휘말리거나 던져지거나 내몰린 사람들이다. 설정 같은 걸 하지 말자”고 이야기를 했어요. 원래 현장 편집본이 2시간 55분인데, 거의 50분을 덜어냈습니다. 쉽지 않더군요.

<브이아이피>는 기존에 각인된 배우들의 이미지를 뒤집어 반전을 꾀하는 영화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브이아이피>는 기존에 각인된 배우들의 이미지를 뒤집어 반전을 꾀하는 영화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브이아이피>는 배우의 기존 이미지를 전복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단정하던 김명민은 폭주하고, 화사한 이종석은 피 냄새가 풍기죠. 반전을 염두에 둔 캐스팅인가요.

그렇죠. 김명민, 이종석과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연기 변신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얼굴에서 또 다른 모습을 끄집어낸다고 생각하길 바랐죠. 어쨌든 기존의 이미지가 있고, 이미 그들은 대중에게 각인된 스타니까요. 하지만 그 상황에서 완전히 낯설어지면, 그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수 있습니다. 배우 입장에서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예를 들어 한국 영화에는 ‘꼴통 형사’가 많이 나오죠. 김명민도 자칫 잘못하면 그렇고 그런 꼴통 형사로 보일 수 있고. 하지만 전 다른 사람이 하면 몰라도, 김명민이 하면 절대 그렇게 안 보일 거라고 봤어요.

이종석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우가 기존 사이코패스들과 어떻게 차별을 둬야 할지 고민하더라고요. 그래서 이종석에게 “다른 배우가 사이코패스 역할을 한 것과 정말 다를 거다”라고 말했어요. 지금까지 이종석이 보여준 연기나 캐릭터, 이미지가 있잖아요. 해맑게 웃으면서 사람을 죽이고 조롱하는 김광일은 정말 새로운 캐릭터일 것 같았어요. 일단 그렇게 전제를 하고 시작했죠. 그냥 배우들이 현장에서 놀다가길 바랐습니다.

형사 채이도 역의 김명민은 <신세계>에 합류하려다 불발됐다고 들었습니다. 결국 <브이아이피>에서 함께 작업했는데, 김명민과 꼭 함께하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습니까?

김명민은 무명 시절부터 그냥 눈에 띄는 배우였습니다. '저 배우 되게 괜찮은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김명민이 드라마 <하얀 거탑>(MBC,2007)에서 의사 장준혁을 연기할 때부터 팬이 됐습니다. 언젠가 한번 작품을 꼭 하고 싶었는데 서로 일정이나 상황이 안 맞더라고요. 이번에 마침 시간이 딱 된다고 해서 같이 하게 됐죠.

장동건이 맡은 국정원 요원 박재혁은 넷 중에서는 가장 평범한 ‘직장인’ 같은 인물입니다. 지금까지 장동건이 맡은 캐릭터 중에서도 가장 ‘일상의 리얼리티’가 필요한 캐릭터죠. 하지만 그 과정이 쉽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일상적으로 만나기엔 참 평범하지 않은 미모의 배우니까요. 

그 고민을 장동건 배우도, 저도 했어요. 하지만 <브이아이피>는 캐릭터 중심이 아닌, 사건 중심 영화니까요. 관객이 사건을 중심으로 따라오면, 보통의 회사원 같은 정장을 입은 장동건을 평범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안경만 쓰지 말자고 했죠. 괜히 안경이 장동건의 ‘잘생김’을 가리는 작위적 설정으로 보일 수도 있잖아요. 그도 “나는 안경이 잘 안어울린다”고 말하기도 했고. 그런데 피팅할 때 장동건 배우가 안경을 써보고는 “이거 괜찮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씌웠지만요.

지금의 장동건이란 배우는 예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장동건이 아닙니다. 나이도 있고, 세월의 흔적도 느껴져요. 전 그게 너무 좋더라고요. 제가 중년 배우들의 얼굴을 좋아해요. 특히 누아르 속 배우는 뽀송뽀송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거칠고 주름도 좀 있어야죠. 지금의 장동건이라면 충분히 제가 원하는 박재혁 얼굴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리대범 역의 박희순은 감독님의 첫 감독 데뷔작 <혈투>(2010)에 이어 <브이아이피>에도 출연했습니다. 인연이 꽤 깊은데, 연출자와 배우로서 잘 맞는 편인가요?

<혈투>의 아픔을 함께한 사이죠.(웃음) 그게 그런 것 같아요. 기쁨을 함께한 사이는 오래 못 갈 수 있어도, 아픔을 함께한 사이는 좀 오래 가죠. 저는 박희순의 아우라와 그 얼굴을 좋아합니다. 눈이 사슴 같아서 슬픈데 예뻐요. 제가 외국 배우들 중에 제일 좋아하는 남자 배우가 양조위예요. 눈빛이 굉장히 깊어요. 사연 있어 보이고. 저는 말을 하지 않아도 분위기가 있는 배우들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박훈정 감독이 <브이아이피>에서 가장 고민했던 지점은 김광일의 악마성을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박훈정 감독이 <브이아이피>에서 가장 고민했던 지점은 김광일의 악마성을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브이아이피>는 총 5챕터로 나눠서 전개됩니다. 원래는 소설로 낼 계획이었다고요? 

맞아요. 당시 저는 만사 귀찮은 상황이었어요.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할 수 있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는 인물별 챕터 4개와 사건별 챕터 5개를 합쳐 총 9개 챕터로 구상했어요. 한번은 “요즘 책으로 내려고 이런 스토리 잡고 있어”라고 말했는데, 주변에서 영화로 만들자고 하더라고요. 소설은 분량 제한이 없지만, 영화는 러닝타임이 있잖아요. 그래서 캐릭터 챕터가 싹 빠지고 사건 챕터만 영화에 남았어요. 영화에선 캐릭터의 전사나 사연을 보여주진 않았지만, 그들의 성격 자체가 좀 센 편이죠.

시나리오를 집필할 때 제일 어려웠던 부분이 어디인가요?

김광일의 악마성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였습니다. 잘못하면 아버지 빽 믿고 덤비는 천방지축 망나니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나라 재벌 2세의 북한 버전이 될까 봐 걱정도 했습니다. 그의 악마성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그 부분이 제일 관건이었어요.

김광일의 악마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장면이 소녀를 살해하는 오프닝 장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상세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나, 라는 거부 반응도 일고 있습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어요. 그런데 김광일의 악마적인 얼굴을 보여줘야 했습니다. 극 중 다른 캐릭터들의 입을 통해서 “김광일은 정말 사이코패스고 살인마”라는 게 언급되죠. 하지만 오프닝 장면 외에는 김광일의 악마성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없어요. '여기서 확실하게 이 인물을 각인시켜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연출자로서 강박도 좀 있었겠죠. 그래서 희생된 소녀와 김광일을 계속 대비시키는 컷들을 배열했어요. 소녀가 느낀 공포심 혹은 김광일이 겪게 되는 지옥도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것들이 표현되어야 한다고 봤어요. 장면의 수위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았습니다. 제가 봐도 불편했으니까요. 편집 과정에서 그 장면을 빼보기도 했는데, 그러면 김광일이 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철없는 망나니가 되더라고요.

관객 반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번에 깨달았습니다. 제 전작들을 보시면 아겠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제가 여성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낮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성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게 아니고 아예 없었던 겁니다. 이해도가 거의 무지의 수준에 가까운 거였어요. 분명히 (해당 장면에 대해) 불편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여성 관객들은 더욱 그럴 수도 있다는 걸 인지는 했어요. 하지만 제 예상보다 더 세게 (반응이) 오더라고요. 그건 정말 생각지 못했어요.

현실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여성 피해 범죄가 겹쳐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연쇄살인범들이 거의 여성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죠. 저도 작품을 하면서도 고민 없이 당연하게 피해자를 여성으로 설정하곤 했어요. 이번 일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간 남자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뤘는데, 차기작 <마녀>는 악의 조직에서 킬러로 길러진 여고생이 주인공입니다. 이렇게 방향을 전환한 이유가 있나요?

한 번 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마녀>의 모티프는 전복(顚覆)입니다. 그 한 단어에서 시작됐어요. 뭔가 좀 뒤집어 엎는 느낌이랄까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

<마녀>의 설정이 올해 개봉한 <악녀>와 유사한 지점도 있습니다. <악녀>를 보셨나요?

그때는 한창 <브이아이피> 후반작업 중이어서 아직 못 봤습니다. 지금 봐야 하는 영화가 굉장히 많거든요. 그런데 다음 달부터 바로 <마녀> 촬영을 시작해야 합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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