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설경구 “팬들 덕분에 외롭지 않다”

2017-09-07 15:54 차지수 기자

[맥스무비= 차지수 기자] <살인자의 기억법>은 연기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설경구를 구원한 특별한 작품이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연쇄살인마의 얼굴을 상상하느라 “머리에 쥐가 났다”고 얼굴을 구기다가도 금새 생기를 드러내며 즐거워 한다. 설경구의 변화를 감지한 마니아 팬들까지 얻은 덕분이다.

설경구는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알츠하이머에 걸린 연쇄살인범 김병수를 연기했다. 그는 김병수의 독특한 얼굴을 상상하는 과정에서 연기의 즐거움을 되찾았다고 털어놨다. 사진 쇼박스
설경구는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알츠하이머에 걸린 연쇄살인범 김병수를 연기했다. 그는 김병수의 독특한 얼굴을 상상하는 과정에서 연기의 즐거움을 되찾았다고 털어놨다. 사진 쇼박스

첫 화면부터 아주 충격적인 비주얼로 등장합니다. 연쇄살인마 김병수의 얼굴을 만들기 위해 고민이 참 많았겠습니다.

언론시사회에서 완성된 영화를 처음 봤는데, 제 얼굴 보느라 영화 전체를 제대로 못 봤을 정도입니다. 촬영 전에 외형에 대한 고민이 굉장히 많았거든요. 첫 화면에서 관객들이 김병수의 얼굴을 보고 ‘이게 뭐야?’라고 생각해버리면 영화의 힘이 떨어질 것 같았습니다. 딱 첫 얼굴에서 신뢰를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유난히 외형에 매달렸죠. 평소의 제 모습과 너무 다른, 만들어진 얼굴이니까 의심도 많고 걱정도 많았습니다. 영화를 볼 때도 얼마나 강박을 느끼면서 봤는지 모릅니다.

<나의 독재자>(2014)에서도 노인 분장을 한 적 있습니다만 그때보다 훨씬 날것의 느낌이 나는 얼굴인 것 같습니다.

<살인자의 기억법>을 찍기 전까지는 캐릭터에 맞게 살을 찌우라면 찌고, 빼라면 빼곤 했습니다. 이번에는 좀 달랐습니다. <나의 독재자> 때 했던 특수 분장을 해야 하나 싶었는데, 아닌 것 같더라고요. 김병수 캐릭터는 얼굴 근육을 많이 써야 하는데, 분장할 때 쓰는 본드가 얼굴을 마비시키니까요. 위험한 선택인 것 같아서 살을 뺀다기보다는 “제가 늙어볼게요”라고 했습니다. 외형이 눈에 띄었으면 해서 머리 뒷부분에만 단발머리 가발을 썼고요.

살인을 멈춘 지 17년이 지난 알츠하이머 환자라니 언뜻 상상하기 어려운 캐릭터입니다. 처음 김병수 캐릭터를 만났을 때 어떤 이미지를 떠올랐습니까?

소설도 읽고 시나리오도 다 읽었는데, 완전히 다른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병수가 소설에서는 훨씬 건조한 느낌인 반면, 영화에서는 딸 은희(김설현)에 대한 부분이 포함되면서 조금 더 온기를 품었죠. 배우가 연기하고자 했을 때 소설보다는 시나리오의 캐릭터가 더 숨을 쉬게 해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연쇄살인마가 품은 일말의 온기를 드러내는 연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요. 

김병수가 마냥 무거운 인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의외로 가볍기도 하고, 코믹하기도 하고, 가끔 무모하기도 한 입체적 인물로 생각했죠. 다만 내면에 깊은 고민을 안은 사람이라고까지 생각하지는 않아서 최대한 단순화하려고 했습니다. 워낙 일상적이지 않은 캐릭터라 표현의 수위를 잡기가 어려웠어요. 고민이 많아서 촬영하는 동안 잠을 깊이 못 잤습니다. 원신연 감독과 최대한 많은 대화를 하면서 같이 만들어 나갔습니다.

설경구는 김병수 역할을 위해 특수 분장을 최소화했다. 얼굴 근육을 자유자재로 쓰기 위해서다. 김병수는 기억을 잃어버리려고 할 때마다 얼굴 한 쪽에 경련을 일으킨다. 사진 쇼박스
설경구는 김병수 역할을 위해 특수 분장을 최소화했다. 얼굴 근육을 자유자재로 쓰기 위해서다. 김병수는 기억을 잃어버리려고 할 때마다 얼굴 한 쪽에 경련을 일으킨다. 사진 쇼박스

김병수는 살인과 사적복수를 정당화합니다. 배우 입장에서 이해가 되던가요?

원신연 감독은 제가 병수를 응원했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병수가 오랫동안 살인을 멈췄다고 하더라도 제가 어떻게 그의 행동을 응원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정당화 해도 살인은 살인인데 말이죠. 그래서 병수를 응원한다는 생각보다는 그가 딸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습니다.

소설보다 영화에서는 김병수의 부성애가 여러모로 극적인 장치로 기능합니다. 

저는 병수의 트라우마가 가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첫 살인이 가족을 위해 폭력적인 아버지를 죽인 거였잖아요. 어른이 된 후 병수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뇌손상이 왔지만 아마 아버지를 죽였던 그때 이미 뇌손상, 트라우마가 생겼을 거라고 분석했습니다. 말로는 세상을 청소한다고 하지만 분명 내상을 입은 거죠. 그때부터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을 거고, 결코 행복하지 않았을 겁니다.

김병수가 기억을 잃으려고 할 때마다 얼굴이 경련이 나는 설정은 어떻게 만들어진 건가요?

소설에는 나오지 않는 설정이지만 시나리오에는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병수가 지금 기억을 잃어버리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잃지 않기 애쓰고 버티고 있다, 그러다가 기억을 결국 잃고 만다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한 사인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죠.

설경구 배우의 액션 스릴러에는 언제나 육탄전이 존재합니다. 이번에도 김남길 배우와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는데, 이 역시 소설에는 없는 설정입니다.

원작이랑은 전혀 안 맞는 톤의 그림일 수 있는데, 상업 영화에서는 필요한 설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연쇄살인범인 남자 둘이 결판을 내야 하니, 목숨을 걸고 싸우죠. 누군가는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기 때문에 처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찍을 때도 정말 처절하게 찍었어요. 무려 나흘 동안!

처절하게 찍은만큼 가장 고생스러웠던 장면이 아니었을까요?

아뇨. 제가 가장 고심하고 고생했던 장면은 아까 말씀드렸던 첫 장면입니다. 첫 등장에 믿음을 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요? 촬영 며칠 전부터 머리에 쥐가 나더라고요. 정말 미치겠다고 생각했어요. 김병수가 지금 엄청 혼란스럽다는 게 첫 등장부터 바로 보여야했으니까요. 첫 장면이었지만 촬영 마지막 날 찍었어요. 강원도 정선에서 눈을 맞으며 촬영했죠. 처음엔 가발을 쓰고 촬영했는데 모니터로 확인해 보니까 집중이 하나도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가발 다 벗어버리고 다시 찍었어요. 정말 엄청 신경썼던 장면입니다.

터널 때문인지 그 장면에서 설경구 배우의 대표작 <박하사탕>(2000)이 떠오르기도 합니다.(웃음)

저는 일상에서도 터널만 보면 <박하사탕>이 생각나긴 합니다.(웃음)

지난 5월 개봉한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으로 전에 없던 마니아 팬층을 확보한 설경구. 연기하는 게 늘 외로웠다는 그는 팬들 덕분에 더 이상 외롭지 않다고 고백했다. 사진 쇼박스
지난 5월 개봉한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으로 전에 없던 마니아 팬층을 확보한 설경구. 연기하는 게 늘 외로웠다는 그는 팬들 덕분에 더 이상 외롭지 않다고 고백했다. 사진 쇼박스

<살인자의 기억법><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보다 먼저 촬영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연기에 대한 재미를 되찾은 덕에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도 즐겁게 찍었다고 했죠?

맞아요. <살인자의 기억법>을 찍은 게 2년 전인데, 그 즈음에 제가 수년 동안 기계적인 연기를 해왔구나 깨달았습니다. 도통 긴장감도 없고, 고민도 없고. 그래서 ‘그만 둬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생각을 할 때 이 작품을 만난 거예요. 고민을 안 하면 안 되는 작품이었죠.

얼굴 얘기도 아까 했지만, 이번에 원신연 감독과 상의해가면서 만드는 과정에서 재미를 처음 느꼈어요. ‘이번 영화는 어떻게 해야겠다‘고 작정하고 덤빈 게 아니라 ‘이 사람은 어떤 얼굴을 갖고 살까‘ 자연스레 궁금해지더라고요. 그 재미가 <불한당>까지 이어진 것이고요.

<불한당> 덕분에 설경구 배우의 팬층이 부쩍 늘었습니다. 요즘 인기를 실감하나요? 

네. 그 현상의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요.(웃음) 저 때문에 시작된 건 아니고, 관객들이 작품을 보고, 그 캐릭터를 보고, 그러다가 저를 보게 된 것 같아요. 그저 감사할 따름이죠. 극장을 대관해서 무대 인사를 갔었는데, 엄청 소리를 질러 주시더군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고 주변에 물어봤을 정도였어요.

<불한당> 개봉 당시에 외적인 논란도 있었는데 이후 영화와 설경구 배우를 응원하는 팬 덕분에 힘이 많이 나셨겠어요.

그럼요. 힘을 많이 받았고, 외롭지 않았어요. 늘 외롭다고 생각했는데, 요새 안 외로워요.

칸국제영화제까지 초청 받았는데 결국 변성현 감독은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함께한 배우로서 아쉬움이 많이 남았을 것 같은데요.

물론 변 감독이 잘못한 부분이 있긴 하죠. 그래도 너무 풀이 죽어있으니까 좀 안타깝더라고요. 칸에 갔을 때 박찬욱 감독과 함께한 자리가 있었거든요. 박 감독님이 변 감독에게 직접 힘내라고 말이라도 해주면 좀 기운 차릴까 싶어서 바로 전화했더니, 받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영화제에 초대 받은 영화 목록이 담긴 책자 하나 갖다 줬어요. ‘네 영화가 초청됐다’는 증거로요. 축제 후반부로 갈수록 변 감독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빨리 다시 기운차리라고 제가 채근도 하고 그럽니다.

얼마 전에 임시완 배우가 입대했습니다. <불한당> 배우들의 인연은 잘 이어지고 있나요?

시완이 머리 깎을 때 제가 옆에 있었어요. 입대하는 날 머리 깎는다고 해서 제가 미용실에 쳐 들어갔죠. 그 현장을 제가 그대로 담았습니다. 제대할 때 이 장면을 액자에 넣어서 선물해준다고 했어요.(웃음) 벌써 전화도 몇 번 왔어요. “너 벌써 퇴소했냐?” 그랬더니 시간 너무 안 간다고 그러대요.(웃음)

<살인자의 기억법>과 <불한당>으로 되찾은 재미를 현장에서도 이어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차기작에서 보여줄 모습들을 더 기대해도 될까요?

제가 느끼는 재미가 겉으로도 잘 드러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려고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캐릭터의 얼굴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 영향인지 요새 저도 모르게 강한 캐릭터, 사연 있는 캐릭터를 찾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은 이수진 감독의 <우상>을 준비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캐릭터의 얼굴에 대한 고민을 꽤 하는 중이에요. 아직 구체적으로 결정된 건 없지만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말로 계속 내뱉고 있죠. 고민들을 생각만 하지 말고 말로 계속 내뱉으면서 주변에 표현하는 것도 중요하다는것을 배우고 있습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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