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라> 깊이읽기 | 상실의 세대에 관한 영화

2017-09-21 14:00 정유미 기자

[맥스무비= 정유미 기자] SF 애니메이션의 교과서라 불리는 오토모 가츠히로 감독의 애니메이션 <아키라>(1988)가 정식 개봉으로 21세기 관객을 찾아왔다. 시대를 앞서는 상상력과 비주얼,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은 30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위력적이다. <아키라>가 어떻게 걸작으로 탄생할 수 있었는지 제작 배경과 세계관을 돌이켜본다.

3차 세계대전으로 붕괴된 도쿄에 새롭게 세워진 네오도쿄는 <아키라>만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사진 삼지애니메이션
3차 세계대전으로 붕괴된 도쿄에 새롭게 세워진 네오도쿄는 <아키라>만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사진 삼지애니메이션

영화가 시작되면 날짜가 뜬다. 1988년 7월 16일. 영화 <아키라>의 개봉일이다. 그 위로 핵 폭발을 연상시키는, 돔 모양의 거대한 재난 이미지가 화면을 채운다. 다음 장면은 31년 후, 3차대전을 겪은 2019년의 네오 도쿄다. 그러니까 개봉 당시 이 영화를 본 일본 관객들은 일종의 묵시록을 접하는 셈이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동시대의 일본은,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폭발로 인해 다시 폐허가 되었다. 한 세대가 지났고, 재건을 통해 네오 도쿄가 만들어졌다.

흥미로운 건 <아키라>의 네오 도쿄는 올림픽을 앞두고 있다. 과거를 소환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설정이다.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던 일본은 1964년 도쿄 올림픽을 통해 일본의 재건을 알렸다. <아키라>는 3차대전 후 일본의 부활을 2020년 네오 도쿄 올림픽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 살짝 소름 돋는 건, 실제로 2020년에 일본 도쿄에서 올림픽이 열린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키라>가 예언한 올림픽과 실제로 열릴 올림픽은, 매우 유사한 역사적 맥락을 지닌다. 현실이든 허구든, ‘2020년 도쿄 올림픽’은 국가적 재건의 이벤트다.

역사와 판타지 사이

<아키라>는 1986년 제작 당시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사상 최고 금액인 제작비 10억 원이 투입되었고, 8개 애니메이션 회사가 모인 최대 프로젝트였다. 사진 삼지애니메이션
<아키라>는 1986년 제작 당시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사상 최고 금액인 제작비 10억 원이 투입되었고, 8개 애니메이션 회사가 모인 최대 프로젝트였다. 사진 삼지애니메이션

1964년 올림픽을 경험한 후 고도 성장을 거듭했던 일본은 (1970년대에 오일 쇼크를 겪긴 했지만) 1980년대에 사상 유례 없는 호황기인 이른바 ‘버블 경제’ 시기를 맞이한다. <아키라> 제작에 애니메이션으로서는 파격적인 10억 엔의 제작비가 투여될 수 있었던 것도 돈이 넘쳐나던 당시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런 토대에서 만들어진 <아키라>는 잿더미로 변한 도쿄를 보여준다. 사회의 모든 에너지가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고, 도쿄의 부동산을 모두 팔면 미국 전체를 살 수 있다던, 물신주의적 판타지가 정점에 올랐던 1980년대 말에 오토모 가츠히로 감독은 충격적 파국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예언이었다. 거품이 꺼진 일본 경제는 1990년대에 ‘잃어버린 10년’을 겪으며 2000년대까지 장기적인 침체가 이어졌고, 2010년대에 들어서며 조금씩 살아났다. 이 시기 아베 정권이 계획한 것이 바로 도쿄 올림픽이다. 56년 전에 그랬듯, <아키라>의 올림픽이 그렇듯, 2020년에 도쿄에서 열릴 32회 하계 올림픽 역시 ‘되살아난 일본’을 선포하는 이벤트인 셈이다.

치밀한 의도든 기가 막힌 우연이든, <아키라>는 시간을 초월하는 예언적 텍스트가 되어 버렸다. 테크놀로지가 곧 디스토피아의 조건이 되는 ‘사이버펑크 무비’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일본 애니메이션의 분기점이며, 초월적인 힘을 다루는 SF인 <아키라>는, 이런 장르적인 의미 이전에 다양한 방식으로 일본이라는 맥락을 환기시킨다. 네오 도쿄의 마천루 뒤에선 1960년대를 연상시키는 과격한 정치 시위를 정부가 폭력으로 진압한다. 도시 한구석에선 ‘아키라’를 메시아로 앙망하는, 1990년대 옴 진리교를 떠올리게 하는 사교 집단이 있다. 정치 세력의 부패,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거대한 힘에 대한 두려움과 매혹이라는 양가적 감정 등  <아키라>가 제시하는 미래는 일본의 역사적 DNA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배양되어 배열된 세계다. 여기서 오토모 가츠히로 감독이 <아키라>에 아로새긴 공들인 묘사들은 수많은 구체적 디테일을 드러내지만, 그렇다고 이 작품을 단지 현실에 대한 메타포로 만들진 않는다. <아키라>는 역사적 맥락과 SF 장르의 판타지 사이를 폭주하며 오간다.

오토모 가츠히로의 소년들 

시라케세대를 대표하는 <아키라>의 데츠오나 카네다는 네오 도쿄와 올드 도쿄의 경계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사진 삼지애니메이션
시라케세대를 대표하는 <아키라>의 데츠오나 카네다는 네오 도쿄와 올드 도쿄의 경계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사진 삼지애니메이션

<아키라> 세계관을 이야기할 땐 감독의 세대론적 배경도 빼놓을 수 없다. 1954년에 태어난 오토모 가츠히로는 1960년대에 청년기를 맞이한 전공투 세대도 아니고, 1970년대 말부터 등장한 신인류 세대도 아니다. 그 사이에 있는 이른바 ‘시라케세대 しらけ世代 ’라 할 수 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 세대를 이야기하며 “목적 상실에서 비롯된 욕구 불만”을 언급한다. 이것은 <아키라>의 데츠오나 카네다를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수식어다. 마천루와 슬럼 지역이 공존하는, 네오 도쿄와 올드 도쿄의 경계에서 그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그들이 스스로를 증명하는 방식은 목적 없는 폭주와 좀 더 멋진 바이크뿐이다. 정치적 무관심과 어설픈 개인주의와 사회적 부적응 상태. <아키라>는 ‘상실의 세대’에 대한 영화다.

거대 도시와 테크놀로지의 세계에서 개인이 겪는 소외는 오토모 가츠히로 애니메이션의 중요한 테마다. <미궁 이야기>(1987)의 ‘공사중지명령’ 에피소드에서 로봇 노동자들은 인간 관리자의 명령을 거부한다. <메모리즈>(1995)의 ‘대포 도시’ 에피소드에서 도시는 매일 맹목적인 전쟁을 치르고 아이는 병영 사회의 일원이 되어간다. 19세기 중반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스팀보이>(2003)에서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발명한 테크놀로지 속에서 점점 광적인 상태가 된다. <아키라>의 테츠오도 마찬가지다. 타카시와 우연히 충돌하면서 초능력이 각성된 그는 군부에 의해 인간 병기로 관리되고 이후 자신의 힘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폭주한다. 여기서 감독은 주로 소년 캐릭터를 통해 그들이 어떤 이데올로기에 젖어들고 그것에 저항하고 성장하며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소년 테츠오는 구원자인가 파괴자인가

고아이자 아웃사이더 10대 폭주족 테츠오는 우연히 초현실적인 힘을 얻는다. 그는 새로운 시대의 구원자인가 아니면 파괴자인가. 사진 삼지애니메이션
고아이자 아웃사이더 10대 폭주족 테츠오는 우연히 초현실적인 힘을 얻는다. 그는 새로운 시대의 구원자인가 아니면 파괴자인가. 사진 삼지애니메이션

하지만 테츠오가 다른 소년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건 그가 고아라는 점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버림 받았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다. <스팀 보이>가 주인공 소년 레이와 아버지 에디와 할아버지 로이드까지 3대에 걸친 가족 드라마라는 점을 떠올리면, <아키라>의 테츠오는 더욱 이질적인 존재다. 테츠오는 가족이라는 전통적 가치 체계를 벗어난 아웃사이더이며, 인생 막장인 직업 학교에 다니는 틴에이저이며, 어린 나이에 폭력과 약물에 중독된 폭주족이며, 결과적으로는 스피드를 즐기는 루저다. 영화는 그런 테츠오가 초현실적인 거대한 힘을 우연히 얻게 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그는 새로운 시대의 구원자인가 아니면 파괴자인가.

거대한 힘을 이기지 못한 테츠오는 괴물이 되고, 그의 육체는 내부에서 외부로 폭발한다. 도쿄 스타디움이라는 상징적 구조물은 테츠오에 의해 산산조각 나고, 그는 마치 우주적 존재가 된 듯하다. “나는 테츠오다.” 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아키라가 아니라 테츠오에 의해 새로운 질서의 세계가 도래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조금 모호하다. 그가 만들어낸 세계는 우리와 어떤 관련성이 있는 걸까. 이러한 대파국과 재탄생의 과정은 현실/테크놀로지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초월적 힘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판타지인 걸까? 어쩌면 <아키라>는 미래가 어떤 모습일 거라고 제시하는 SF가 아니라, 세상은 이렇게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걸 보여주는, 일말의 희망도 없는 묵시록일지도 모르겠다.

글 김형석(영화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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