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만세 | ‘오 루시!’ 히라야나기 아츠코 감독 “포옹은 자신을 맡기는 행위”

2018-07-02 14:28 정유미 기자

[맥스무비= 정유미 기자] 퍽퍽한 일상을 보내던 43살의 비혼 여성 세츠코(테라지마 시노부)는 조카가 다니는 영어학원에 대리 수강하러 갔다가  ‘루시’라는 영어 이름을 얻고 그동안 억누르며 살아온 감정을 드러낸다. 히라야나기 아츠코 감독은 미국 교환학생 시절 타지에서 느꼈던 감상을 중년 여성 캐릭터에 담아낸 동명 단편을 장편으로 확장시켜 여성뿐아니라 현대인이 겪는 소외와 단절을 독특한 감성으로 이야기한다.

외롭고 웃기고 쓸쓸한 첫 장편으로 주목해야 할 일본감독 대열에 이름을 올린 히라야나기 아츠코 감독과 서면으로 조금 긴 대화를 나누었다.

# ‘오 루시!’ 단편에서 장편으로

‘오 루시!’로 장편 데뷔한 히라야나기 아츠코 감독은 두 편의 단편으로 세계 영화계에 주목을 받았다. 단편 ‘오 루시!’(2014)는 2015년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상 국제단편을 수상했고, 데뷔 단편 ‘한번 더’는 2012년 쇼트쇼츠국제단편영화제 대상 수상, 10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사진제공 엣나인
‘오 루시!’로 장편 데뷔한 히라야나기 아츠코 감독은 두 편의 단편으로 세계 영화계에 주목을 받았다. 단편 ‘오 루시!’(2014)는 2015년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상 국제단편을 수상했고, 데뷔 단편 ‘한번 더’는 2012년 쇼트쇼츠국제단편영화제 대상 수상, 10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사진제공 엣나인

 ‘오 루시!’ 공동 시나리오 작가이자 뉴욕대학교 티시 예술대학 재학시절 담당 교수였던 보리스 프루민에게 이건 장편 감은 아냐. 단편 감이지.”라는 얘기를 들으셨다고요. 단편을 장편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이건 장편 감은 아냐. 단편 감이지”라고 한 것은 ‘도쿄의 독신 OL(Office Lady)이 이상한 영어학원에 가게 되고, 그 경험을 통해 그녀 자신이 변해가는 과정’이라는 내용을 장편 아이디어로 교수님께 피치 했을 때의 일입니다. 확실히 도쿄의 영어 학원 이야기만으로는 장편으로는 힘들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장편으로 확장하면서 추가된 부분이 있다면요?

단편 ‘오 루시!’는 장편의 초반부 약 20분 정도에 해당합니다. 단편 이후 주인공 세츠코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그린 것이 장편 ‘오 루시!’입니다. 장편의 세츠코는 사랑에 빠진 영어 강사 존(조쉬 하트넷)을 뒤쫓아 미국으로 가게 되는데, 실은 미국을 여행하는 OL의 이야기는 이미 다른 작품의 시나리오로 썼었습니다. OL이 변화 없는 하루하루에 답답함을 느끼고 자신을 억누르며 살아가는 부분, 미국 여행을 하면서 그녀의 내면이 자유롭게 해방되는 부분 등이 세츠코와도 통한다는 생각이 들어 두 이야기를 합치기로 했습니다.

영화의 아이디어는 당신이 아는 누군가’에 관한 작문 실습수업에서 출발했는데  아츠코 감독이 만난 인물들 중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그려질 것 같지 않은 사람을 골라냈다고 들었습니다. 이 작품에 직접적으로 영감을 준 인물을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그녀는 자신의 의견이나 정말 하고 싶은 말을 항상 숨기고 있는 것 같은 사람입니다. ‘루시’라는 캐릭터의 정체성을 빌려 속내를 내뱉는다면 과연 어떤 말을 할까?라는 상상에서부터 스토리 구성이 시작되었습니다.

#오 테라지마 시노부 & 조시 하트넷 & 야쿠쇼 코지!

(왼쪽부터)2017년  70회 칸국제영화제에 참석한 ‘오 루시!’  히라야나기 아츠코 감독과 주연배우 테라지마 시노부. 아츠코 감독은 ‘바이브레이터’에서 테라지마 시노부의 연기를 보고 세츠코 역에 캐스팅했다. 사진제공 엣나인
(왼쪽부터)2017년  70회 칸국제영화제에 참석한 ‘오 루시!’  히라야나기 아츠코 감독과 주연배우 테라지마 시노부. 아츠코 감독은 ‘바이브레이터’에서 테라지마 시노부의 연기를 보고 세츠코 역에 캐스팅했다. 사진제공 엣나인

단편에서는 모모이 가오리가 세츠코를 연기했습니다. 장편에서 주인공을 새롭게 캐스팅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연령 설정을 바꾼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나이를 바꾼 것은 스토리를 보다 현실적으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테라지마 시노부는 ‘바이브레이터’ (2003)를 시작으로 ‘도쿄타워’ (2004) ‘사랑의 유형지’ (2006)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2012) 등에서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연기해왔습니다. 테라지마 시노부의 출연작들이 캐스팅에 영향을 주었나요?

테라지마 시노부라는 배우를 알게 된 것은 약 9년 전 미국에서 친구 권유로 바이브레이터’를 본 것이 계기였습니다. 테라지마 시노부의  연기를 보고 ‘일본에도 이런 연기를 하는 여배우가 있구나’라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프로듀서로부터 받은 세츠코 역 후보 리스트에 테라지마 시노부의 이름을 보자마자 직관적으로 그녀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테라지마 시노부와 작업은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테라지마 시노부는 이 영화의 동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 닮은 점이 많고, 너무 마음이 잘 맞아 리허설 없이 현장에 임했지만, 텔레파시로 마음을 읽은 것처럼 제 의도를 잘 이해하고 멋진 연기를 해주었습니다. 어려운 장면도 너무도 쉽게 소화하는 정말 멋진 배우입니다.

‘오 루시!’는 일본의 중견배우 야쿠쇼 코지, 할리우드 스타 조쉬 하트넷, 일본의 연기파 배우 테라지마 시노부 세 배우의 연기와 호흡이 돋보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진제공 엣나인
‘오 루시!’는 일본의 중견배우 야쿠쇼 코지, 할리우드 스타 조쉬 하트넷, 일본의 연기파 배우 테라지마 시노부 세 배우의 연기와 호흡이 돋보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진제공 엣나인

일본 영화에 할리우드 스타 조쉬 하트넷이 출연한 점도 오 루시!’가 흥미를 끄는 지점입니다. 조쉬 하트넷이 휴식기를 가진다는 기사를 읽고 무언가 말을 걸어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느낌이었나요?

조쉬 하트넷이 배우로서 전성기에 할리우드를 떠나 고향인 미네소타에서 살고 있다는 기사를 읽고 당시 대중이 가진 조쉬의 이미지와 자신과의 갈등으로 자신의 축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한편으론 그가 가진 반항심 같은 것도 느꼈습니다. 그런 경험을 한 조쉬라면 존이라는 캐릭터와 영화를 잘 이해해 주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휴식기를 가지고 있는 조쉬 하트넷을 캐스팅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요청했나요?

다행스럽게도 제가 조쉬와 같은 에이전시에 있었기 때문에 에이전트를 통해 그에게 각본과 단편 <오 루시!>를 보냈습니다. 48시간 후에 런던에 있는 조쉬에게 전화가 왔고 우리는 15분 정도 이야기를 주고받은 후 캐스팅 수락을 받았습니다. 로케이션 헌팅 중이었는데 너무도 기쁜 나머지 자리에서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 올랐습니다.(웃음)

세츠코의 영어 강습 파트너로 출연한 야쿠쇼 코지는 적은 분량이지만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대배우 야쿠쇼 코지와 작업은 어땠습니까. 

야쿠쇼 코지와도 리허설을 하지 않았지만 촬영 전 여러 가지 구체적이고 날카로운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감독으로서 많이 배운 느낌이 듭니다. 야쿠쇼 코지가 나타나면 현장의 공기가 바뀌는 것 같은 존재감을 가진 배우로 매번 프로의 연기에 압도당했습니다.

#세츠코의 영어 이름이 루시인 까닭

‘오 루시!’ 일본 포스터. 히라야나기 아츠코 감독은 맥스무비와 인터뷰에서  ‘오피스 레이디Office Lady’와 고전 코미디 영화 ‘I love lucy!’에 영감을 받아 제목을 지었다고 밝혔다. 사진제공 엣나인
‘오 루시!’ 일본 포스터. 히라야나기 아츠코 감독은 맥스무비와 인터뷰에서  ‘오피스 레이디Office Lady’와 고전 코미디 영화 ‘I love lucy!’에 영감을 받아 제목을 지었다고 밝혔다. 사진제공 엣나인

많은 영어 이름 중에서 루시를 선택한 무엇인가요? 여성 이름으로 많이 쓰는 이름이어서인지 빛을 가져오는 자라는 이름 뜻 때문인지 궁금합니다.

사실 ‘Oh Lucy!’라는 제목은 OL(Office Lady)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L"이 붙는 아메리칸 이름을 찾고 있었고 ‘Lucy’가 적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고전 코미디 ‘I love lucy!’(1951)에서 루실 볼이 연기한 소란스러운 캐릭터 ‘루시’의 이미지가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영어 학원에서 얻게 될 새로운 정체성은 세츠코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인물로 하고 싶었기 때문에 조용히 숨죽이며 살아가는 OL 세츠코에게 루시라는 이름은 제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목을 루시로 정하시지 않고 제목 앞뒤에 감탄사를 붙인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만큼 루시가 평상시와는 확실히 다른 세계로 벗어 날 수도 있다는 예시를 주고 싶었습니다.

자막 없이 영화를 보고 싶다는 대사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모든 비영어권 사람들의 희망사항이지 않을까요?(웃음)

그렇네요. 저도 미국유학 초기 때 일본에 잠시 머무르면서 미국 영화를 보러 가면 상영 후 "전부 자막 없이 이해할 수 있지?"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빨리 "응"이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습니다.(웃음)

# 포옹은 누군가에게 자신을 맡기는 행위

‘오 루시!’의 첫 장면은 출근길에 세츠코가 겪는 사고로 시작한다. 히라야나기 아츠코 감독은 일본의 현실을 반영한 장면이자 세츠코의 내면을 상징하는 풍경이라고 말했다. 사진제공 엣나인
‘오 루시!’의 첫 장면은 출근길에 세츠코가 겪는 사고로 시작한다. 히라야나기 아츠코 감독은 일본의 현실을 반영한 장면이자 세츠코의 내면을 상징하는 풍경이라고 말했다. 사진제공 엣나인

오프닝과 세츠코가 미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왔을 때 일본의 출근 풍경이 인상적입니다. 마스크를 착용하거나 무표정한 인간 군상, 일상적인 투신사고를 최근 일본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자 한 의도같습니다.

의식해서 일본 사회를 반영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세츠코 자신과 그녀의 내면의 상태를 상징하는 풍경으로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세츠코는 일본 사회에 속한 사람이므로 어떤 의미 간접적으로 일본 사회를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세츠코의 남자친구와 결혼한 세츠코의 언니, 조카 미카의 남자친구와 관계한 세츠코. 세 가족의 관계 설정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영화에서는 세 사람의 관계가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셨는데 이들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셨나요?

세츠코와 언니와 조카 미카의 관계를 복구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관계가 회복되려면 상당한 시간과 세츠코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가족이기 때문에 어떤 형식으로든 재회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존과 세츠코는 두 번 다시 만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촬영 중에 애드립이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애드립이었던 장면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처음 영어 수업 장면은 조쉬 하트넷에게 애드립으로 연기 해달라고 했었습니다.

존과 관계를 맺은 세츠코는 사랑 愛(애)자를 타투로 새기고 존에게 보여주지만 외면당합니다. 조카 미카가 존과 애정의 표시로 새긴 글씨와 같은 글자로 설정한 이유는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는 뜻인가요?

꼭 그런 이유는 아닙니다만,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충동에 사로잡혀 불장난 후 후회하게 되고, 그야말로 촌스러운 문신을 보며 문득 ‘그땐 사랑이었지’라고 생각하게 되는(웃음) 그리고 존에게 전혀 사랑 받지 못한 세츠코가 새겨 넣은 문신은 반대로 너무나 아이러니한 것이죠.

히라야나기 아츠코 감독은 ‘오 루시!’를 본 관객에게 “영화를 보는 동안 조금이라도 세츠코의 감정에 이입하는 장면이 있다면 영광”이라고 말했다. 사진제공 엣나인
히라야나기 아츠코 감독은 ‘오 루시!’를 본 관객에게 “영화를 보는 동안 조금이라도 세츠코의 감정에 이입하는 장면이 있다면 영광”이라고 말했다. 사진제공 엣나인

오 루시!’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포옹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츠코를 비롯해 인물들이 포옹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지만 외로움을 극복하는 가장 강력한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츠코 감독이 생각하는 포옹의 의미에 좀 더 듣고 싶습니다.

포옹은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는 없는 문화로 우리에겐 매우 낯선 행위입니다. 어떤 의미에선 머리에 스위치 켜고 아메리칸화 하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맡기는 행위를 세츠코에게 시키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포옹이 아닐까 합니다.

‘오 루시!’를 보고 아츠코 감독의 두 번째 장편을 기대하는 관객이 많습니다. 지금 구상하는 작품이나 앞으로 만들고자 하는 영화에 대해 들려주신다면요.

현재 코미디 드라마와 SF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고 에이전트에서 보내온 시나리오도 읽고 있습니다 (아직 좀처럼 이거다!라고 생각하는 작품은 보이지 않습니다.) 장르 불문하고, 아직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 20대의 히라야나기 아츠코에게 보내는 러브레터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일 중 중요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으니 너를 믿고 열심히 해! Follow your heart.”

http://news.maxmovie.com/379406

http://news.maxmovie.com/379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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