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만세 l ‘변산’ 이준익 감독 “누구나 잊고 싶었던 과거를 마주합니다”  

2018-07-13 17:56 성선해 기자

[맥스무비= 성선해 기자] ‘변산’은 무명의 래퍼가 주인공이다. 하지만 전라북도 변산 버전 ‘8마일’은 아니다. 랩은 전채요리일 뿐, 본 메뉴는 일상성 짙은 드라마다. 고향에서 잊고 싶었던 과거와 마주한 학수(박정민)의 이야기다. 그럼에도 힙합 정신은 '변산'의 기본 정서다. “값나게 살진 못해도 후지게 살지는 말어!” “언제까지 피해 다닐 것이여. 니는 정면을 안 봐!”라고 하는 선미(김고은)의 대사는 결국 ‘변산’이 하고 싶은 말이기 때문이다.

# ‘변산랩을 걷어내면 보이는 것들

이준익 감독이 '변산'으로 돌아왔다. '동주'에서 함께했던 박정민과 다시 한 배에 탔다. 사진 메가박스플러스엠
이준익 감독이 '변산'으로 돌아왔다. '동주'에서 함께했던 박정민과 다시 한 배에 탔다. 사진 메가박스플러스엠

동주’(2016)박열’(2017)을 지나 변산으로 왔습니다. 현재가 배경인 영화는 오랜만에 연출했습니다.

전작들로부터 가장 멀리 도망가고 싶었어요. 그러려고 찍은 영화입니다. 물론 ‘동주’나 ‘박열’을 기대한 관객들은 실망할 수도 있어요. “뭐야, 난 ‘동주’를 기대했는데 이상한 영화 찍고 그래.” 그렇지만 전작으로부터 가장 멀리 나아가는 게 창작자의 길이니까요. 이준익이라는 라벨을 떼고 보면 그게 보일 겁니다.

주인공은 무명 래퍼 학수입니다. 영화 내내 랩이 학수의 독백처럼 등장합니다. 가사 전달을 위해 자막을 넣기도 했고요.

사실 힙합이라는 소재는 위험 요소가 다분합니다. 힙합을 모르는 사람이 영화를 보면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어요. 또 힙합을 정말 좋아하는 친구들의 시선도 생각해야죠. 영화 속 랩이 별로라면 바로 외면당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래퍼를 주인공으로 택한 건, 영화의 사회적 기능 때문입니다. 기성세대에게 힙합은 ‘시끄러운 장르’잖아요. 하지만 ‘변산’을 보고나면 ‘이렇게 좋은 거였어?’라고 생각하실 수 있으리라 봅니다. 부모와 아들, 딸이 모인 저녁시간 대화 소재가 넓어지지 않을까 싶고요. “도끼가 걔야? 랩 좋더라.” 이럴 수도 있는 거죠.

'변산'의 주인공 학수는 꿈을 향해 나아가지만, 정작 자신의 상처뿐인 과거는 외면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이다. 사진 메가박스플러스엠
'변산'의 주인공 학수는 꿈을 향해 나아가지만, 정작 자신의 상처뿐인 과거는 외면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이다. 사진 메가박스플러스엠

랩이란 포장지를 걷어내면 보이는 본질은 꽤 보편적인 정서입니다. 부끄러운 과거를 뒤로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갖고 있는 부분이죠.

맞아요. 극 중 학수의 나이는 30대 초반입니다. 누구나 잊고 싶었던 지난날을 마주하잖아요. 그건 나이와 상관없는 거죠. 성장 과정에서 부끄러웠던 순간은 누구나 있잖아요. (과거 건달로 살았던) 학수의 아버지(장항선)도 마찬가지고요. 저만해도 잠깐만 생각해도 ‘파바박’ 몇 개가 떠올라요. 그걸 외면하면서 여태껏 최대한 멀리 도망 온 거죠. 학수도 10년 동안 도망 다녔어요. 서울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습은 껍데기인 겁니다. 귀향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 거죠.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게 ‘변산’의 목적입니다.

금의환향에 대한 갈망 역시 공감대가 넓은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대부분의 서울라이트(Seoulite)’의 뿌리는 비수도권이니까요. 서울은 이방인들의 도시이기도 하죠.

맞아요. 요즘 수도권 인구가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7~80%래요. 물론 ‘나는 서울의 아파트에서 태어났으니 고향이 없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건 물질적 의미의 고향인 거고요. 정서적인 고향은 누구나 갖고 있다고 봐요. 그 안에는 친구, 선배, 부모, 사촌 등이 함께한 기억들이 있을 거고요.

가족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킬레스건입니다. 가장 소중한 존재이지만, 징글징글한 순간도 있죠. 그럼에도 학수의 가족 드라마는 산뜻하고 유쾌해요.

오히려 욕심만큼 못 웃겨서 불만입니다. 하하. 흔히들 ‘유머를 사용했다’라고 표현하죠. 저는 해학 혹은 익살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각 나라와 민족은 역사가 달라요. 유머 코드도 다르죠. 동양과 서양도 대척점이 있습니다. 서양은 살짝 비꼬잖아요. 친절한 척 하면서 뒤통수를 치는 거죠. 위선이랄까요. 우리는 위악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시골에 가보면 다들 싸우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잖아요. 알고 보면 그들만의 정다움을 표현 중인 겁니다. ‘변산’도 마찬가지예요. 아버지가 학수에게 “컴온, 컴온! 때려, 이 새끼야”라고 말하잖아요. 아들에게 맞고 싶은 아버지의 절규입니다. 물론 아들이 아버지를 주먹으로 때리는 상황은 일상에서는 없는 이야기에요. 영화니까 가능한 거죠. 비현실적인 현상으로 현실을 풍자하는 겁니다.

# 베테랑 감독이 디렉션을 거부한 이유

'변산'은 이준익 감독만의 영화가 아니다. 이준익 감독과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만들었다. 사진 메가박스플러스엠
'변산'은 이준익 감독만의 영화가 아니다. 이준익 감독과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만들었다. 사진 메가박스플러스엠

박정민의 순발력도 변산이 가진 즐거움에 큰 역할을 했어요. 타이밍을 가늠하는 감각은 코미디에서 아주 귀중한 재능이잖아요. 

저는 박정민이 천재라고 봅니다. 그만큼 역할에 몰입을 했다는 거죠. 그러면 현장에서 아주 예민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 외우거나 설정에만 치중하면 나올 수가 없는 반응이에요. 산소 앞에 있던 학수가 선미의 욕설을 듣고 “누구여?!”라고 하는 신이 대표적이죠. 그 대사는 박정민의 애드리브입니다. 학수의 입장에서는 교복 입은 여자애가 보이긴 하죠. 근데 걔가 하는 말이 내 욕인 건지도 잘 모르겠는 겁니다. 박정민이 거기까지 생각한 거죠. 시나리오 단계에서는 나올 수가 없는 대사입니다.

학수 외에 다른 캐릭터들도 선명합니다. 개성 강한 인물들이 부딪히면서 생기는 상황들이 재미를 주죠.

모든 사람이 주인공이니까요. 보통 장르 영화는 나머지 인물들이 주인공을 보조하는 역할입니다. ‘변산’은 아니에요. 물론 주인공은 학수이지만, 학수만 주인공인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나 선미, 용대(고준)와 원준(김준한), 미경(신현빈)도 주인공이죠. 각자 자기 삶의 주체로서 목소리를 내고 있으니까요.

선미는 학수에게 정면을 보라고 말합니다. ‘변산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이 함축적으로 담긴 문장인 거죠?

살면서 매 순간 정면을 보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러길 바란다는 마음을 담은 표현입니다. 선미는 학수의 본질을 정말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학수가 어릴 적 갖고 있던 순수함을 봤으니까요. 10여년이 지나서 재회를 했어요. 요놈이 완전 날라리가 된 겁니다.(웃음) “정면을 보라”는 말은 어릴 적 순수성을 회복하라는 뜻인 거죠.

박정민과는 동주에 이어 두 번째 호흡입니다. 김준한도 마찬가지이고요. 배우들이 다시 만나고 싶은 감독으로 꼽더군요. 인격적 대우를 해주는 연출자라고 입을 모았어요.

아이고, 그건 오버예요! 고맙긴 합니다. 누군가 뒤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주니 감사하죠. 제 면전에다가 하면 아부처럼 들렸을 테지만요. 하하. 감독으로서 그 사람이 가진 고유의 성질을 존중해주는 것일 뿐입니다. 제가 캐스팅했잖아요. 그 순간 이미 인정을 한 겁니다. 인정을 했으면 믿어야죠. 그래놓고 의심하면? 그건 배신인 겁니다. 저는 그저 책임을 지면 되는 거고요.

# 꼰대와 청춘이 사이좋게 지내는 방법

이준익 감독은 40세를 기점으로 철을 빼고 있다. 꼰대로 남지 않기 위한 그의 노력이다. 사진 메가박스플러스엠
이준익 감독은 40세를 기점으로 철을 빼고 있다. 꼰대로 남지 않기 위한 그의 노력이다. 사진 메가박스플러스엠

박정민을 두고 맛있는 양아치성을 가진 모범생이라고 평했습니다. 박정민은 이준익 감독에 대해 아재이지만 꼰대가 아니다라고 하더군요.

아닙니다, 저 꼰대 맞아요. 내 안에 꼰대가 있는 걸요. 하하. 단지 꼰대 기질과 청춘이 사이좋게 지내는 거죠. “육체는 젊게 태어나서 늙어 간다. 영혼은 늙게 태어나서 젊어간다.” 오스카 와일드가 남긴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깨달은 게 있어요. 칠십 먹은 노인이라고 해서 정신도 노쇠한 건 아니라는 겁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젊음을 갖고 있을 수도 있죠. 그렇다면 꼰대가 되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철을 빼는 겁니다. 그럼 영혼이 젊어지겠죠.

흥미로운 가설이네요. 이준익 감독이 철을 빼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인가요?

마흔한 살부터입니다. 제가 60세인데, 완전히 다 빼려면 아직 10년 더 남았어요. 생각해보세요. 열 살까지는 철이 없어도 어른들이 ‘아유, 애가 그렇지’라고 봐줍니다. 그런데 열한 살이 되면 ‘너 언제 철들래’라고 하거든요.(웃음) 그리고 마흔한 살 까지는 계속 철이 들어야 합니다. 아니면 사회생활하면서 먹고 살 수가 없으니까요. 결국 30년 동안 철이 들었잖아요. 그걸 빼려면 또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겠죠.

가끔 외모와 정신적 나이가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요.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하고, 머리는 하얀데 동심이 보이죠. 예술가나 시인, 음악가들이요. 그 사람들도 30~40대에는 꼰대였을 겁니다. 사회에 부딪히면서 치열하게 살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철을 빼면서 달라진 거죠.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들이 자신을 바꾸면 세대 간 갈등이나 집단 이기주의가 덜하지 않을까요?

마흔을 기점으로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변화가 있었군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 법 합니다.

당시 저는 회사 대표였어요. 영화감독이기도 했고요. 제가 하던 일을 누군가에게 물려줘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힘들었어요. 간섭을 안하려다 보니 성질이 나서요.(웃음) 애써 외면하고 다른 일에 몰입했죠. 그런데 그 부하직원이 저보다 더 잘 됐어요. 즉, 후배 말을 잘 들어야 했던 거죠. 그럼 철이 잘 빠지는 겁니다. 하하. 배우들이 저보고 ‘디렉션을 안 주는 감독’이라고 대놓고 말하잖아요. ‘변산’도 박정민 말 듣고 찍었어요.

행복을 상징하는 세 잎 클로버. 이준익 감독의 세 잎 클로버는 영화다. 사진 메가박스플러스엠
행복을 상징하는 세 잎 클로버. 이준익 감독의 세 잎 클로버는 영화다. 사진 메가박스플러스엠

변산의 주인공들은 청춘입니다. 아직 철이 들어가는 중이죠. 실제 이준익 감독의 20대는 어땠나요?

엉망진창 중구난방이었어요. 치열하게 살긴 했습니다. 사람이 사는 건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절에도 젊은 세대는 버르장머리가 없었을 겁니다. 하하. 사람은 어차피 한 번 태어나서 죽잖아요. 인생에는 복습이 없는 거죠. 지금 청춘이 죽을 때까지 청춘이란 법도 없고요. 꼰대들도 처음부터 꼰대는 아니었을 겁니다. 단지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까먹은 거죠.

그렇다면 이준익 감독이 생각하는 멋진 어른은 어떤 모습입니까. 어떤 삶을 꾸려가야 한다고 보시나요?

행복을 추구해야죠. 예를 들어 사람들은 네 잎 클로버만 찾잖아요. 행운의 상징이니까요. 그런데 세 잎 클로버가 행복을 상징한데요. 일상에 널린 행복을 앞에 두고 행운을 찾는 거죠. 네 잎 클로버를 잡으려고 세 잎 클로버를 다 짓밟을 수는 없잖아요. 늘 그런 질문을 갖고 살면 좋을 것 같아요. 학수 아버지의 대사처럼 ‘잘 사는 게 최고의 복수’이니까요.

동주박열그리고 변산을 잇는 이준익 감독의 다음 화두는 무엇인가요?

지금은 그저 ‘다음 영화 뭘 할까’ 생각 중입니다. 선택은 안 했어요. 감독은 영화라는 정류장을 거쳐가는 사람입니다. 그 종점을 제가 정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의 뜻대로 따라갈 수도 있는 거죠. ‘변산’이 끝나면 그다음 정류장이 보이지 않을까요? 영화는 늘 새로워요. 항상 처음 하는 것 같습니다. 작품마다 시대와 인물이 다르니까요.

※ 감독만세(萬世)는 맥스무비의 감독 전문 인터뷰 코너입니다. 감독의 만 가지 세상, 만 명의 감독을 만날 때까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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