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영화 속 멀티 페르소나, 결핍을 채우는 또 다른 정체성

2019-12-13 09:00 정찬혁 기자

[맥스무비= 정찬혁 기자] 매년 소비 트렌드 전망을 발표하는 김난도 교수는 2020년 주요 키워드 중 하나로 ‘멀티 페르소나’를 꼽았다. 현대인은 직장과 퇴근 후 모습이 다르고, SNS에서 모습이 다르다. 각 계정마다 가면을 쓰듯 매 순간 다른 정체성으로 소통한다. 이처럼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분리되는 정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을 뜻하는 ‘마이셀프(Myself)’가 복수인 마이셀브즈(Myselves)가 돼야 한다는 것이 김난도 교수의 주장이다.

현대인은 다양한 이유로 멀티 페르소나를 갖는다. 한 정체성에 종속되기엔 너무나 다양한 관계성이 있을 수 있고,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해 새로운 가면을 쓸 수도 있다. 연예인, 유명인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소환된 악플러들을 보면 의외로 평범한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현실에서 풀지 못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현실 속 자신을 가리고 악의 가면을 쓴다.

영화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다크 나이트’ 스틸. 사진 소니픽쳐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다크 나이트’ 스틸. 사진 소니픽쳐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에서 다원화된 정체성을 다루는 방식은 정체를 숨긴 영웅(빌런)의 서사,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일탈, 가상현실에 생성된 아바타 등이 있다. 영화 속 슈퍼 히어로는 일상을 유지하고 주변인을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가면을 쓴다.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 피터 파커는 내성적인 고등학생으로 배트맨은 방탕한 대부호로 정체를 숨긴다. 이 같은 영웅 서사는 평범한 삶과 충돌하며 갈등을 빚는다. 영웅의 이중생활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면 다른 경우는 현재 상황이 충족해주지 못한 결핍을 채우기 위함이다.

‘반칙왕’(감독 김지운)에서 소심한 은행원 임대호는 퇴근 후에는 반칙왕 레슬러가 된다. 직장상사에게 치이고 단조로운 생활이 계속되던 차에 임대호는 레슬링을 배우며 해방을 느낀다. 레슬러 반칙왕은 매번 고개를 숙이는 임대호와 달리 화끈하게 반칙을 일삼는다. 정반대 성향의 인물을 만들어낸 그는 일상에서도 활력을 찾는다.

영화 ‘반칙왕’, ‘파이트 클럽’ 스틸. 사진 ㈜시네마서비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영화 ‘반칙왕’, ‘파이트 클럽’ 스틸. 사진 ㈜시네마서비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파이트 클럽’(감독 데이빗 핀처)에도 멀티 페르소나는 해방을 위한 수단으로 쓰인다. 자동차 사고 조사원인 잭은 평범한 일상에 점점 무기력해지고 불면증을 앓는다. 우연히 자신과는 정반대로 사는 테일러를 만난 그는 세상과 규칙에 저항하는 파이트 클럽을 창설한다. 이후 반전은 있지만 싸움을 통해 잭은 새로운 자아, 진정한 자유와 만난다.

‘쥬만지: 넥스트 레벨’에서 주인공은 가상 캐릭터를 진짜 자신을 되찾는 도구로 삼는다. ‘쥬만지: 새로운 세계’에서 우연히 게임 속으로 들어간 스펜서는 ‘쥬만지: 넥스트 레벨’에서 자발적으로 게임 속에 뛰어든다. 현실에서 스펜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다 혼나기 일쑤고 여자친구와 관계도 어색하다. 눈치만 보는 공부벌레 스펜서와 달리 ‘쥬만지’ 속 고고학자 닥터 브레이브스톤은 거대한 근육질 몸과 자신감 넘치는 미소(?)의 소유자다. 우여곡절 끝에 스펜서는 브레이브스톤을 통해 미션을 해결하고 현실에서도 자신을 찾고 관계를 회복한다.

영화 ‘쥬만지: 넥스트 레벨’, ‘레디 플레이어 원’ 스틸. 사진 소니픽쳐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쥬만지: 넥스트 레벨’, ‘레디 플레이어 원’ 스틸. 사진 소니픽쳐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2045년 미래를 그린 ‘레디 플레이어 원’(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에서 사람들은 암울한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상현실 오아시스(OASIS)를 택한다. 오아시스에서 유저들은 성별과 겉모습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 현실에서 아무도 관심 없는 빈민가 소년인 와츠는 오아시스에서 창시자가 죽기 전에 숨겨둔 오아시스 소유권과 막대한 유산이 담긴 이스터 에그 관문을 통과하며 모두에게 주목 받는다.

영화 속에 그려진 멀티 페르소나는 자신이 처한 현실보다 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진짜 자신’을 찾는 것에 있다. 기술 발달로 우리는 사이버 공간에서 손쉽게 다중 자아를 생성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정체성의 기반은 약해졌다. 이로써 고유한 실체로서의 경험, 타인과 구분되는 개인으로서 존재가 흐려지게 된다. 허상에 매몰된다면 가면을 벗은 진짜 모습을 상실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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