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해치지 않아’, ‘잡초처럼 자란’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

2019-12-31 14:16 박재은 기자

[맥스무비= 박재은 기자] 손재곤 감독이 10년만에 신작 ‘해치지 않아’로 돌아왔다.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부득이한 상황 탓에 동물 탈 속으로 숨을 수 밖에 없던 인물 개개인 형편에 주목한다. 영화는 캐릭터를 통해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 모습을 반추하며 때로는 헤프게 터지는 웃음 속에 소소한 감동과 위로의 메시지를 담아 보낸다.

#이상한 나라의 태수

영화 '해치지 않아' 스틸. 사진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영화 '해치지 않아' 스틸. 사진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전작 ‘족구왕’(감독 우문기), ‘소공녀’(감독 전고운) 등 작품으로 어리숙한 청춘을 묘사해왔던 배우 안재홍이 이번 작품에서는 태수 역을 맡으며 다시 한 번 우리네 모습을 대변한다.

태수는 번지르르한 변호사 딱지를 달고 있으면서도 말단 수습직원 신세를 면치 못하는 서글픈 나날을 이어간다. “잡초처럼 자란 놈이라 파이팅 있을 거야!” 제이에이치그룹 황대표(박혁권)가 묘사하는 태수의 모습은 마냥 깔깔댈 수만은 없는, 자조적인 웃음을 유발한다. 영화가 그려내는 태수는 우리 시대 자화상이다. 그의 시점에서 풀어가는 인생이야기는 쓰디쓴 공감을 안긴다. 내가 걸어가는 이 길이 과연 옳은 방향인가 싶은 생각이 들지만, 돈 없고 받쳐줄 배경 조차 없는 청춘은 그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하루를 버틸 뿐이다. 태수는 인생이라는 이름의 아스라한 외나무다리를 건너며 황대표가 내려준 ‘3개월 안에 동물원 재건’ 동아줄을 덥석 움켜쥔다. 그것이 금 동아줄이건 썩은 동아줄이건 그저 부딪혀 볼 뿐이다.

영화 '해치지 않아' 스틸. 사진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영화 '해치지 않아' 스틸. 사진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동물이 한 마리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한 동물원에 도착한 태수는 ‘고릴라 숲’으로 뛰어가는 건욱(김성오)을 발견한다. 텅 빈 동물원, 건욱을 쫓는 태수의 모습이 기묘하게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시킨다. 신비롭게 다가오는 이 장면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다른 점이 있다면 앨리스는 토끼 굴에 빠져 오색 찬란 이상한 나라 시민들을 만나는 반면, 태수는 우중충한 동물원 사무실에 도착해 죽을상을 한 직원들과 조우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동물원 직원들을 통해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투영한다. “동물원이나 말아먹고!”를 입에 달고 사는 자존감 바닥 서원장(박영규)이나 사랑 앞에 한 없이 작아지는 해경(전여빈)처럼 고단한 인생사 일도 사랑도 녹록지 않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 했던가. 캐릭터들은 저마다 심각한 이유를 가지고 고군분투 하지만 스크린 너머 방관자들은 그 모습에서 어쩐지 자꾸만 폭소를 자아내게 된다.

#명품 신스틸러, 의외의 연기변신에 성공한 배우들

영화 '해치지 않아' 스틸. 사진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영화 '해치지 않아' 스틸. 사진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이번 작품에서 단연 돋보인 것은 명품 신스틸러들의 활약이다. 서정적이고 단아한 이미지를 이어가던 한예리는 이번 작품에서 제이에이치그룹 민상무 역을 맡아 의외의 연기변신에 성공했다. 그가 연기한 민상무는 안하무인이면서 대중에게 비치는 시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속물 중 속물이다. 영화는 그의 모습을 통해 사회에 만연한 ‘갑질’ 이슈를 풍자한다.

뮤지컬과 드라마를 오가며 보다 묵직한 연기를 선보였던 장승조는 이번 작품에서 성민 역을 맡아 그 동안 쌓아온 이미지와 정 반대 캐릭터에 도전한다. 성민은 여자친구 해경을 등쳐먹는 파렴치한으로 한없이 가볍고 밉상이기 그지없다.

손 감독의 전작에서도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냈던 김기천이 이번 작품에는 동물 탈 전문가 고대표로 열연, 어김없이 신스틸러 대열에 합류했다. 동물 탈을 마치 짜장면이나 짬뽕 주문하듯 휙휙 골라내는 그 모습에 웃음을 참아낼 재간이 없다. “됩니다!” 어떠한 부름에도 그저 예스를 외치는, 예스맨 고대표의 대사가 귓가를 울리며 2020년 첫 번째 유행어를 예감한다.

밉상, 진상을 선보이는 신스틸러들도 저마다 아기자기한 귀여움을 발산하며 작품의 매력 더한다. 손 감독은 영화가 가지는 재미에 감초 배우들을 첨가해 마치 신스틸러 종합 선물 세트 같은 유쾌함을 선사한다.

#손재곤 감독이 전하는 착한 영화

영화 '해치지 않아' 스틸. 사진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영화 '해치지 않아' 스틸. 사진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감동과 재미를 한아름 담아낸 이 영화가 한편으로 아쉽게 느껴지는 까닭은 초반부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야기를 급박하게 수습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듯 보였지만 총 49화에 이르는 원작 내용을 전부 담아내기는 역부족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해치지 않아’에 기대를 거는 이유는 영화가 품은 선량한 메시지에 있다. 영화는 태수가 동물 탈을 쓰기 전과 후, 동물을 바라보는 관점에 차이를 둔다. 약자로 묘사되는 동물들과 그런 동물들을 사랑하는 직원들 사이 연대를 통해 성장하는 태수의 모습을 그려냈다. 태수가 문득 다른 사람 모습 속에서 자신의 지난 날을 비추어 봤을 때, 영화는 차디찬 자본주의와 그것이 곧 권력이 되는 야멸차고 인정머리 없는 세상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작고 약한 것들을 자꾸만 돌아보게 만드는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잡초처럼 자라난’ 이들에게 일말의 휴식 같은 따스한 위로를 건넨다.

영화정보

개봉 : 1월 15일/ 관람등급 : 12세 관람가/ 출연 : 안재홍, 강소라, 박영규, 김성오, 전여빈, 박혁권, 서현우, 장승조, 그리고 한예리, 김기천/ 감독 : 손재곤/ 제작 : 어바웃필름, 디씨지플러스/ 배급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러닝타임 : 117분/ 별점 : ★★★

박재은 기자 / jeunny@maxmovi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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