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민의 번외편 | 불닭과 캡사이신, 그리고 '백두산'

2020-01-06 10:28 박현민 기자

[맥스무비= 박현민 기자] 2000년대 초중반, 여러 아르바이트를 경험했다. 음식점 서빙도 그중 하나다. 삼겹살을 시작으로 닭한마리, 모둠전, 족발, 빙수 등 다양한 형태의 음식을 테이블에 앉은 손님께 전달했다. 기억에 남는 메뉴를 꼽자면 ‘불닭’이다. 한때 나름의 유행을 탔던 해당 음식은 그 자체로 충분히 매웠음에도 불구하고, 손님 중 일부는 “당장 먹고 죽을 만큼 더 맵게 해달라”라고 간곡한 요청을 덧붙였다. 이를 전달받은 주방의 이모님은 비장한 표정으로 ‘캡사이신’(고추에 들어있는 매운맛을 내는 성분)을 쏟아부어 화답했다. 손님 대부분은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영화 '백두산' 스틸. 사진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백두산' 스틸. 사진 CJ 엔터테인먼트

‘맛’으로 먹는 게 아닌 ‘자극’을 목구멍에 억지로 밀어 넣어 삼키는 가학적 행위에 가까웠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오래도록 쌓인 스트레스를 날리기 위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그것이 당시 불닭이라는 음식을 마주한 손님들의 일반적인 행태였다. “맵지 않다”고 볼멘소리를 내는 사람은 있었지만, “음식이 맛 없다”고 컴플레인 하는 이들은 드물었다. 맛을 고민하기보다 전보다 더 매운 불닭을 만들기 위해 고심하면 됐다. 음식이라면 당연히 맛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송두리째 뒤흔든 사건이었다.

블록버스터 재난 영화, 그리고 굵직한 스타급 배우들의 출연으로 이미 충분히 떠들썩하게 홍보가 된 ‘백두산’을 관람했다. 러닝타임 128분이 순식간에 삭제됐다. 영화 초반부터 화려하게 몰아친 서울 시내 한복판의 지진 장면 도입은, 관객 모두를 짧은 시간 작품에 몰입하게끔 만들었다. 실제로 익히 알고 있던 장소가 대형 지진에 맞닥뜨린 모습은 생경한 충격이었다. 빌딩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던 지영(배수지)이 지진을 뚫고, 어떻게 집으로 안전하게 갔는지에 대한 설명은 중요한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무려 260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탄생시킨 VFX(Visual Effects)가 화산재처럼 온통 작품을 새하얗게 뒤덮었다.

쌍천만이라는 놀라운 스코어를 달성한 영화 ‘신과함께’로 진일보한 CG(Computer Graphics)를 선보이며 ‘우리도 이제 이런 걸 만들 수 있다’라는 것을 알렸던 덱스터 스튜디오는 이번 영화 ‘백두산’을 통해서 그 자부심에 쐐기를 박으려는 것처럼 공을 들인 모양새다. 영화 ‘용가리’ 때를 어렴풋 떠올리며 ‘대한민국 영화의 특수효과가 정말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뤄냈구나!’라는 감탄이 영화를 보는 내내 생겨난 게 사실이다. 덕분에 스토리의 개연성을 꼼꼼하게 따져볼 새도 없었다.

영화 '백두산' 스틸. 사진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백두산' 스틸. 사진 CJ 엔터테인먼트

오래전부터 위험을 예고한 과학자와 이를 무시한 사람들, 뒤이어 닥친 위기와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몇몇 인물들, 답답한 캐릭터의 등장, 방해 요소들 난입, 남북의 이념적 갈등, 미국과 중국의 개입, 희생을 전제로 한 해결책, 인물의 각성, 가족에 기인한 신파, 마침내 감동 등 어디선 본듯한 클리셰의 향연이 교과서처럼 착실하게 펼쳐진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할리우드 영화에서 봤음직한 화려한 비주얼이 눈을 가린다. 이로 인하여 스토리와 개연성에 대한 의문 생성 차단을 바랐다면 성공이다. 여러 악평이 줄을 잇고 있음에도 결국 손익 분기점인 730만 명을 넘겼으니깐.

배우들이야말로 출연료 값을 톡톡히 해냈다. 뻔한 전개와 매력 없는 평면적인 캐릭터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하였으니 가히 놀라운 연기력이 아닐 수 없다. 이병헌과 하정우, 그리도 마동석, 전혜진, 배수지가 애를 참으로 많이 썼다. 배우들의 명연기가 아니었으면 자칫 ‘VFX를 활용한 영상 교본’이 아닌 ‘영화’라는 사실을 자칫 깜빡할 뻔했다.

영화 '백두산' 스틸. 사진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백두산' 스틸. 사진 CJ 엔터테인먼트

백두산 폭발이라는 중차대한 상황에 그 존재감이 증발해버린 듯한 북한 정권의 수뇌부들, 부성애로 똘똘 뭉친 남과 북 아버지 리준평(이병헌)-조인창(하정우)의 5G급 속도 우정 형성, 한강에 빠졌지만 서류를 말리고 멀쩡하게 등장한 지영, 이를 또 우연히 마주친 강봉래(마동석), 사표까지 내고 삼엄한 미군의 경계를 뚫고 USB를 들고 나온 청와대 민정수석 전유경(전혜진), 화산이 터져 서울이 난장판이 된 상황에서도 멀쩡한 백두산 밑 지하 갱도, 바로 뒤 핵폭발에도 여유롭게 내달리는 튼튼한 자동차, 갑자기 툭 튀어나온 엔딩에서 피어나는 개연성에 대한 물음표는, 그러니깐 사치다. 애당초 영화 ‘백두산’의 스토리라는 것은, 영화의 강력한 CG부심을 돕기 위하여 잠깐 차용되는 부수적인 용도 같은 거였음에 틀림없다.

세심한 편집과 여느 평범한 영화가 추구하는 개연성 있는 스토리에 대한 아쉬움은 멀리 밀어두고, ‘어때? 우리 영화 엄청 끝내주게 만들었지?’라고 VFX로 펼치는 플렉스를 온몸으로 만끽하면 되는 거다. 영화관까지 독점한 거대한 자본주의가 탄생시킨, 화려한 특수효과로 점철된 ‘백두산’을 보고 있노라니, 20년이 다 되어가는 오래전 그 ‘캡사이신 불닭’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캡사이신을 잔뜩 머금은 것처럼 입안 전체가 얼얼하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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