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남산의 부장들’ 세련되고 유려한 핏빛 묵시록

2020-01-20 09:00 이유나 기자

[맥스무비= 이유나 기자] “각하, 정치를 좀 더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역대 대통령을 향한 일침 중 가장 유명한 문장이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 오롯이 담겼다. 극중 중앙정보부장이 부마민주항쟁을 군사로 무력화시키려는 대통령에 울분처럼 토한 대사다. 영화 속 그의 이름은 김규평이나, 이 인물이 누구를 모티프로 삼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사람은 없다. 40여 년 전 10.26 대통령 암살사건은 파란을 일으켰고, 독재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총성을 울린 남산의 김부장은 역사가 말해주듯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스틸. 사진 쇼박스
영화 '남산의 부장들' 스틸. 사진 쇼박스

탄탄한 취재기를 담은 논픽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영화 ‘남산의 부장들’(감독 우민호)은 10.26 암살사건이 발발하기까지의 생생한 40일 여정을 따라간다. 18년 독재정권 핵심 인물들이 이름 한 글자씩만 바꿔 온전히 등장하는 가운데, 영화는 민중을 쥐고 흔든 독재정권 낱낱을 그리는 것 대신 개개인간의 얽히고 설키는 이해관계와 이에 비롯된 한 인물의 감정 변화에 초점을 둔다. 서로 속이고 숨기는, 은밀하게 이뤄지는 정치 공작, 그 속에서 한 인물이 지도자 처단 결심을 세우기까지 고초의 과정을 면밀하고 유려하게 묘사한다.

영화는 10.26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그 태풍 전 고요와 함께 시작된다. 김규평은 박통의 신임을 받는 제2의 권력자였으나,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이 미국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비리와 실체를 고발하면서 자신도 권력이 휘청이기 시작한다. 그는 민주주의를 해치는 지도자를 바라보는 세상의 아우성과, 박통의 신임을 잃어가는 자신의 처지를 체감하며 지독한 갈등을 겪는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스틸. 사진 쇼박스
영화 '남산의 부장들' 스틸. 사진 쇼박스

이미 오랫동안 널리 알려진데다 여러 차례 영상화된 역사적 사실을 다시 한번 그려냈다. 그럼에도 세련된 편집, 흡입력 있는 연출, 배우들의 메소드급 열연으로 지루할 틈이 없다. 김규평 역을 맡은 이병헌은 애드리브와 섞여 물 흘러가는 듯한 유려한 연기가 아닌, 단어 하나하나 고심이 묻어나는 정통적인 연기를 구사하며 세련된 느와르와 조화를 이룬다. 작은 동작 하나, 미세한 눈빛 변화만으로도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이며 국내 정상급 배우의 위력을 다시 한번 각인시킨다.

김규평을 중심으로 주변 인물들과 힘을 겨루는 듯한 합연 장면이야말로 압권이다. 박통 역의 이성민,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 역의 곽도원, 경호실장 곽상천 역의 이희준 모두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의 자기주장이 아닌, 역사적 인물 재현에 입각한 연기로 정교한 앙상블을 이뤘다. 이성민과 이희준은실존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각각 분장을 하고 살을 찌우는 노력으로 높은 싱크로율의 캐릭터 소화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스틸. 사진 쇼박스
영화 '남산의 부장들' 스틸. 사진 쇼박스

한 폭의 그림과 같이 어우러지는 해외 로케이션 장면들은 영화에 세련된 기운을 보탠다. 저 멀리 미국 워싱턴 기념탑이 담긴 장면이나, 파리 방돔 광장의 고즈넉하면서도 아름다운 풍광은 대한민국 혁명의 실체와 대조를 이뤄 더욱 인상적이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 최초로 900만 관객(국내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기준)을 동원하며 흥행한 ‘내부자들’의 우민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과거 ‘내부자들’로 흥행 감독 반열에 올랐으나, 일각에서 ‘연출이 과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던 그는 이번 작품을 통해 연출가로서의 발전을 이뤘다. ‘남산의 부장들’은 과할 데 없이 빼어나며, 그 진가는 10.26 사건으로 향하는 극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생생하게 드러난다.

개봉: 1월 22일/관람등급: 15세 관람가/출연: 이병헌, 이성민, 곽도원, 이희준, 김소진 등/감독: 우민호/제작: ㈜하이브미디어코프, ㈜젬스톤픽처스/ 배급: ㈜쇼박스/러닝타임: 113분/별점: ★★★★

이유나 기자 / lyn@maxmovi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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