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시우의 배우만발 | 전도연이란 존재감

2020-02-18 11:20 정시우 기자

[맥스무비= 정시우 기자] 데뷔 초엔 CF 스타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신중하게 작품을 선택하고 캐릭터 안에 자신을 비우고 채워내면서 충무로를 넘어 프랑스 칸마저 접수한 ‘배우’ 그 자체가 됐다. 연기만 특출한 게 아니다. 그가 등장하면 일단 시선이 모인다. 여배우 주연의 영화가 쉽게 투자 받지 못했던 상황에서도 투자자들의 신뢰를 꾸준히 받아왔던 게 전도연이란 존재의 스타성이다. 주연만 8명에 달하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에서 가장 먼저 캐스팅된 배우도 전도연이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로 데뷔하는 신인 감독 김용훈은 전도연이 출연을 결심하자, 이후 캐스팅이 쉽게 풀렸다고 회고한다. 왜 아니겠는가. 전도연은 배우들의 배우다. 누구나 한 번 쯤 같이 일해보고 싶은 연기자.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전도연 스틸. 사진 메가박스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전도연 스틸. 사진 메가박스

일본 작가 소네 케이스케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돈이 돌고 도는 영화다. 삶의 벼랑 끝에 놓인 인물들이 돈가방을 두고 먹고 먹힌다. 비정한 동물의 왕국 같다. 돈가방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 군상들의 욕망은 특별한 소재는 아니다. 멀게는 가이 리치의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부터 가깝게 김무열 주연의 <머니백>까지 무수히 많은 영화에서 돈가방은 인간을 시험에 들게 했다. 전도연도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투견장의 돈가방을 두고 밑바닥 인생들과 피도 눈물도 없는 사투를 펼친 바 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을 통해 전도연은 또 한 번 돈가방에 연류된다. 전도연이 연기한 연희는 아마도 ‘거짓말 탐지기’를 가장 바쁘게 할 인물이다. 거짓말이 취미요, 남들을 속이는 게 특기인 연희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여러 가면을 쓰고 산다. 속 깊은 언니였다가, 치명적인 요부였다가, 잔인한 사업가였다가. 그녀의 전작들에 빗대면 <너는 내 운명>의 애교 많은 은하와 <무뢰한>의 속을 알 수 없는 김혜경과 <해피 엔드>의 욕망하는 여자 최보라 등을 오가는 셈이다. 연기에 있어서만큼은 물러서는 법이 없는 이 배우는, 상황 따른 스위치를 자유자재로 켰다 끈다.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전도연 스틸. 사진 메가박스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전도연 스틸. 사진 메가박스

눈여겨보게 되는 건 전도연의 등판 시점이다. 오프닝 시작 1시간가량 흐르고 나서야 그녀는 모습을 드러낸다. 신기하게도 전도연의 등판과 함께 극엔 보이지 않는 형광등이 하나 켜진 듯한 착각이 인다. 전개에 가속도가 붙는 느낌이 이는 것도 이 지점에서부터다. 조명이 하나 더 달리고, 편집이 빨라져서가 아니다. 그것이 전도연이기 때문이다. 전도연은 흩어져 있는 인물과 사건을 유기적으로 엮으며 극에 몰입감을 끌어올린다. 여러모로 전도연은 이 야심 많은 영화의 엔진이고, 촉매제인 동시에, 시작과 끝이다.

전도연의 이러한 면모는 지난해 12월 개봉한 블록버스터 <백두산>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백두산>에서 전도연은 리준평(이병헌)의 아내 선화 역할로 카메오 출연해 강렬한 인상을 스크린에 박았다. 리준평을 연기한 배우이자 전도연의 오랜 영화적 동지인 이병헌은 그녀의 특별 출연을 환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전도연 존재감이 스토리보다 셀까 걱정”했다고 회고했는데, 매우 적절한 코멘트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전도연은 단 한 신 등장만으로 극의 온도를 완전히 바꿔버린다. 팝콘 무비가 잠시 질곡진 감정의 드라마로 변모하는 것도 이때. 이병헌의 말마따나 리준평과 선화의 굵직한 대화 신은 <백두산> 안에서 스토리보다 강하게 다가오는 측면이 없지 않았으나, 그것이 이질적이라기보다 오히려 극 전체의 완결성을 데우는 역할을 했다. 카메오가 단순한 재미를 넘어 극의 완성도에까지 기여한 건 드문 일이다. 전도연은 그 드문 일을 해내는 배우다.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전도연 스틸. 사진 메가박스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전도연 스틸. 사진 메가박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에서 또 하나 눈여겨보게 되는 건 캐릭터를 운영하는 전도연의 방식이다. 이에 대해서는 함께 연기한 윤여정을 말은 소환해 보자. “도연이가 첫 등장부터 나른하게 등장하는 것을 보고 ‘참 여우 같다’고 생각했어요. (연기는) 그렇게 하는 거죠.” <기생충>과 오스카 외국어상 후보에 오른 스페인 거장 패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페인 앤 글로리>에서 알모도바르는 자신의 자전적인 캐릭터를 통해 배우의 연기를 이렇게 바라본다. “감정을 좀 죽여야 돼. 울지 마. 배우들은 울 기회만 있으면 울더라. 잘하는 배우는 눈물 흘리는 배우가 아니라 눈물을 참으려고 애쓰는 배우니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에서 전도연이 구사하는 연기가 바로 이와 같다. 더하지 않고, 빼는 연기. 부러 드러내지 않는데, 그럼에도 드러나는 연기. 이것이 진짜 존재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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