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파라다이스 힐스’ 신비롭고 기괴한 근미래 잔혹동화

2020-03-11 09:00 이유나 기자

[맥스무비= 이유나 기자] ‘레드 라이딩 후드’ ‘헨젤과 그레텔’ ‘빨간 구두’… 유럽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잔혹동화는 신비롭고 어두운 매력으로 수세기 동안 사랑 받아왔다. 3월, 극장가를 찾아오는 영화 ‘파라다이스 힐스’는 마치 몽롱한 꿈결에 듣던 잔혹동화 같은 작품이다. 눈이 휘둥그래지는 비주얼과 신비한 분위기로 완성시킨 근미래 잔혹동화는 기묘하고 화려한 섬의 비밀을 파헤치며 관객들을 새로운 미스터리 세계로 초대한다.

영화는 성대하고 기괴한 결혼식이 펼쳐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 우마(엠마 로버츠)는 빙글뱅글 돌며 ‘남편의 하녀가 되어 섬기고 모든 걸 바치겠다’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고, 이에 중세풍 예복을 입은 하객들이 일제히 박수갈채를 보내는 기이한 풍경이다. 사람들 사이를 걸어 나가는 우마는 마치 전시품과 같다. 누군가 “따님은 마치 상류층의 표본 같다”고 칭찬하자, 우마의 어머니는 이보다 더 큰 칭찬은 없다는 듯 뿌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우마의 약혼자 역시 과거 까다로운 우마는 온데간데 없이 순종적으로 변화한 것에 “기적”이라 칭하며 감격한다. 그동안 우마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걸까.

영화 '파라다이스 힐스' 스틸. 사진 올스타엔터테인먼트
영화 '파라다이스 힐스' 스틸. 사진 올스타엔터테인먼트

영화 ‘파라다이스 힐스’가 창조한 세계관은 오늘날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수준의 세상이다. 첨단 과학기술이 크게 발전했지만 빈부격차는 더욱 비대해졌고 개개인 모두가 사회 계급에 얽매인다. 상류층 여성들조차 남편을 위해 언제나 스스로를 가꾸고 순종해야 하는 2등 시민에 불과한 퇴보된 시대다. 유토피아를 빙자한 디스토피아인 것이다.

외딴 섬에 고립된 최고급 리조트 파라다이스 힐스는 이 퇴보된 시대의 숙주와 같은 곳이다. 파라다이스 힐스를 관리하는 공작부인(밀라 요보비치)은 이곳을 정서적인 힐링을 위한 공간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여성화’를 요구당하는 여성들이 이곳을 찾아 부모나 남자의 입맛대로 바뀌는 훈련에 돌입하는 감옥이다. 푸른 정원, 장미 숲으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정해진 시간에 자고 기상하며 헤어, 메이크업, 요가 등 다양한 교육이 이뤄진. 각 개인마다 최상의 몸매와 외모를 가꾸기 위한 개인맞춤 식단이 제공되며, 잠들기 전 우유 한잔과 함께 정해진 알약을 복용하는 룰이 주어졌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하는 게 아닌,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하는 우마가 파라다이스 힐스를 탈출하기 위한 계획을 세울 무렵부터 미스터리 장르에 충실한 전개가 이어진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공작부인, 벗어나지 못하는 제한된 공간에서 시청각 영상을 몇 번이고 틀어놓는 세뇌 훈련과 용도를 알 수 없는 알약까지. 하루 하루가 반복될수록 거부감이 커져나간 우마는 주변 인물들의 도움을 받아 탈출을 시도하지만, 파라다이스 힐스에 숨겨진 더 큰 비밀에 직면하며 위기를 겪는다.

영화 '파라다이스 힐스' 스틸. 사진 올스타엔터테인먼트
영화 '파라다이스 힐스' 스틸. 사진 올스타엔터테인먼트

과거 니콜 키드먼 주연작 ‘스텝포드 와이프’와 유사한 줄거리와 주제의식을 지닌 ‘파라다이스 힐스’는 마냥 신선한 작품은 아니다. 한가지 차별점이 있다면 스페인 출신의 젊은 감독 앨리스 웨딩턴이 선사하는 압도적인 분위기와 화려한 미쟝센의 향연일 것이다. 감독은 전작 ‘디스코 인페르노’로 한 차례 증명했던 자신만의 장기를 ‘파라다이스 힐스’를 통해 다시 한번 발산해냈다.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세세한 첨단 과학기술과 중세 문화양식이 어우러진 신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영화는 인형의 집 같은 파라다이스 힐스에서 인형옷이나 다름없는 복장을 한 여성들이 괴상한 훈련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러닝타임의 상당량을 허비한다. 동화 같은 파라다이스 힐스의 구석구석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고, 공간이 자아내는 기묘한 분위기가 매력적이기에 딱히 반감 요소는 아니다.

영화 '파라다이스 힐스' 스틸. 사진 올스타엔터테인먼트
영화 '파라다이스 힐스' 스틸. 사진 올스타엔터테인먼트

밋밋한 캐릭터와 대사들이 파라다이스 힐스의 아름다움에 묻혀버리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할리우드의 젊은 배우 엠마 로버츠를 필두로 ‘레지던트 이블’의 히로인 밀라 요보비치, ‘베이비 드라이버’ ‘분노의 질주: 홉스&쇼’로 이름을 널리 알린 에이사 곤살레스,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아콰피나 등 개성 넘치는 배우들이 한데 모였지만, 각 배역마다 이들의 매력을 십분 살리지 못해 아쉬움을 자아낸다.

그럼에도 ‘파라다이스 힐스’는 외모지상주의와 여성차별이 만연한 세상에 대항하는 주제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쉽게 상상해내기 어려운 디스토피아를 창조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작품이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한들, 여성들에 가해지는 아름다움과 순종에 대한 압박감은 여전히 잔존해 있다. ‘파라다이스 힐스’가 자아내는 독특한 분위기와 그 속에서 피어나는 서스펜스는 이러한 세상에 경종을 울리며, 아름다운 잔혹동화의 결말은 언제나 ‘진정한 자유’임을 일깨운다.

국내개봉: 2020년 3월 19일 / 관람등급: 12세 관람가 / 출연: 엠마 로버츠, 밀라 요보비치, 에이사 곤살레스, 아콰피나, 다니엘 맥도널드 등 / 감독: 앨리스 웨딩턴 / 수입·배급: ㈜올스타엔터테인먼트/러닝타임: 95분/별점: ★★★

이유나 기자 / lyn@maxmovi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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