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이장’ 정승오 감독 “남성들이 먼저 가부장제와 작별하기를…”

2020-03-16 08:00 이유나 기자

[맥스무비= 이유나 기자] 아버지가 묻혀있던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야 한다. 아버지를 이장하기 위해 5남매 중 누이들만 넷이 모였으나, 큰아버지는 막무가내로 “장남 없이 어디 아버지 무덤을 파냐”며 호통친다. 맛있는 막걸리는 막내 남동생에게만 따라주고, “계집애들이 무슨 말이 많아”라는 망언도 들었다. 낡아 빠진 구시대적 관습에 질릴 대로 질린 자매들은 아버지를 기필코 화장시켜 가부장제와 작별을 고하기로 한다.

'이장' 정승오 감독. 사진
'이장' 정승오 감독. 사진

지난 2016년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으로 독립영화계에 존재감을 빛냈던 정승오 감독이 장편영화 데뷔작 ‘이장’으로 극장가를 찾는다. 신인감독의 기개로 가부장제라는 소재를 유쾌하게 펼쳐놓은 영화는 개봉도 전부터 세계적인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폴란드 바르샤바 국제영화제에서 국내 영화 최초로 신인 감독 경쟁 부문 대상, 아시아영화진흥기구가 수여하는 넷팩상 수상 등 17개 국내외 영화제에 초청되고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정승오 감독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경험은 국내 여성영화제에 초청된 순간이었다. ‘이장’은 제10회 광주여성영화제와 제20회 제주여성영화제에 초청돼 선보여졌다. 가부장제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직접적으로 체감해온 여성 관객들이 가부장제를 다룬 ‘이장’에 유독 능동적으로 반응했다.

“여성영화제에서 만난 관객분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곳에 참가한 경험은 제게 가장 뿌듯하면서도 감사하고, 많은 것들을 생각해볼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 여성 관객들은 ‘이장’이라는 영화가 갖고 있는 장점과 한계를 정확히 포착했다. 관객들과 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활발히 나눌 수 있어 굉장히 감사했고, 뜻깊은 순간이었다.”

‘이장’은 현실적인 가족상과 대사를 유려하게 활용해 평단으로부터 호평받았다. 실제로 어디에선가 살고 있을듯한 5남매의 이야기를 통해 가부장제라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정작 외동아들에 조용한 집안에서 자랐다는 정승오 감독은 어머니와 아내의 형제들을 보며 등장인물을 구상했다.

“어머니는 유독 형제가 많으시다. 무려 12남매에 이모가 일곱 분이나 계신다. 아내도 5남매인데, ‘이장’ 속 가족처럼 누나 넷에 막내가 남동생이다. 반면 우리 가족은 어릴 때 일찍 해체돼 집안이 항상 침묵 그 자체였다. 그래서인지 외가 가족들이나 아내 가족들을 만나면 복작복작한 게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그분들을 역할 삼아 이번 영화를 구상하게 됐다. 어렸을 때 외가 가족들을 보며 느낀 것들, 가족들이 많은 풍경을 보고 궁금했던 점들을 영화에 반영했다.”

영화 '이장' 스틸. 사진 인디스토리
영화 '이장' 스틸. 사진 인디스토리

그렇다면 왜 ‘이장’일까. 그동안 영화에서 보기 드물었던 소재 이장 역시 경험에 입각해 떠올렸다.

“어릴 적 명절마다 할머니 묘에 성묘를 갔었다. 어느 날 그 묘지가 아파트 부지로 설정돼 강제 이장을 하는 상황에 놓였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장은 굉장히 이상하게 다가온다. 아파트를 짓겠답시고 죽은 사람들을 굳이 파내서 옮기는 행위가 괴상하더라. 그때 커다란 인상을 받았고, 자연스레 영화 소재로 사용하게 됐다.”

첫째 혜영, 둘째 금옥, 셋째 금희, 넷째 혜연 그리고 마지막 승락까지. 아들을 낳기 위해 줄줄이 딸을 낳는 과거의 전형을 그대로 반영한 가족상이다. 이 중에서도 넷째 혜연은 유독 눈에 띈다. 작은 체구와는 달리 가장 과격하고 반항적인 그는 가부장제와 여성차별에 지독한 혐오를 갖고 있는 인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에서 가장 약한 내면을 보이는 인물이 바로 이 혜연이기도 하다.

“나머지 언니들은 가부장적인 분위기 속에서 나름의 생존방식을 터득하고 살았을 것 같은데 반해, 혜연은 막내 승락과 나란히 성장해오며 관심을 유독 빼앗긴 피해자였을 테다.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고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근원적으로 몸에 배어있던 차별의 폐해가 사회에 나가고 자아가 형성될 즈음 더욱 확장된 것이다. 혜연은 비단 가족 내에서 평등의 목소리를 내는 인물로 단정 지으려 하지 않았다. 혜연의 행동에 대한 근원을 고민하며, 캐릭터에 세심히 접근하려 했던 것 같다.”

'이장' 정승오 감독. 사진
'이장' 정승오 감독. 사진

정승오 감독은 “가부장제와 가장 먼저 작별해야 하는 대상은 바로 남성”이라는 생각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이로 인해 삼대를 걸쳐 쇠약해지는 가부장제의 끄트머리를 그리려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큰아버지는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있는 가부장제를 대표한다. 가부장제가 사라져감을 알지만 어떻게든 관습을 지키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가부장제 아래서 성장해온 막내 남동생 승락은 이 제도가 불합리하고 차별을 조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굳이 이에 대한 목소리를 내지 않고 순응할 뿐이다. 이들과 다르게 혜영의 아들 동민이만큼은 가부장제가 뿌리 뽑힌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제 바람이 깃들어 만들어진 캐릭터다. 이 삼대가 각자의 동생, 아버지, 할아버지와 작별하며 가부장제에도 안녕을 고하는 온도차를 표현하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정승오 감독은 “성 역할에 대한 구분, 미묘하게 드러나는 차별들과 이별하고 자유로운 가족의 형태가 많아지길 응원한다”라는 바람을 전했다.

“’여자니까 안되고, 남자니까 된다’ 식의 생각은 말이 안 되고 이상한 사고방식이다. 기계적으로라도 평등을 이루는 균형적인 가족이 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영화를 통해 많은 관객분들이 일상적이라 몰랐던 가족의 한계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생각해보셨으면 좋겠다. 가족끼리 자유롭게 이야기 나누는 기회를 가져 사이가 더욱 돈독해지실 수 있기를 바란다.”

이유나 기자 / lyn@maxmovi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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