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다시보기 | 아서 플렉은 어떻게 ‘조커’가 됐을까

2020-12-30 11:46 위성주 기자
    히어로 아닌 빌런 탄생 과정 조명한 ‘조커’
    ‘코미디의 왕’ 오마주부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까지

[맥스무비= 위성주 기자] 신선한 소재와 독특한 이야기로 무장한 영화들은 언제나 관객들의 흥미를 돋우지만, 진부한 이야기를 색다른 방식으로 재해석한 작품들 역시 색다른 매력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얼핏 특별할 것 없어 이야기가 다양한 각도와 시선으로 뒤틀려 스크린에 재현될 때, 영화는 관객들에게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감상을 남긴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토드 필립스 감독 작품 ‘조커’(2019)는 이미 수많은 작품에서 다뤄진 캐릭터인 조커를 새롭게 조명해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신화 속 영웅의 탄생구조를 차용하며 악을 영웅의 극복 대상으로만 다뤘던 여타 작품들과 달리, ‘조커’는 악(惡)의 탄생 그 자체를 다룬다.

영화 '어벤져스' 스틸.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영화 '어벤져스' 스틸.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예컨대 마블의 ‘어벤져스’ 시리즈 등은 영웅의 탄생과 성장, 고난과 극복의 수순을 따르며, 오로지 선(善)의 승리와 쟁취를 그려내는데 목표를 뒀다면, ‘조커’ 영웅을 배제한 채 악의 탄생만을 집중 조명한다. 지난 작품들 속 언제나 혐오와 두려움, 격멸과 퇴치의 대상으로만 그려지던 조커는 토드 필립스 감독의 세계 속에서 최초로 자신의 개화 과정을 선보인다.

신화 속 영웅들이 암울한 어린 시절을 지나 조력자를 만나고, 내면의 용기를 깨우쳐 선한 용사로 변모했다면, 심히 궁핍하고 우울한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모든 아픔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웃음을 잃지 않으려던 아서 플렉은 내면에 자리했던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수용한 끝에 광기의 화신 그 자체로 다시 태어난다.

물론 기존 악인으로 분류되곤 했던 캐릭터를 다시금 조명한 영화가 ‘조커’ 이전에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동화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비튼 ‘말레피센트’(2014)가 그 대표격인데, 다만 이와 같은 작품들의 경우, 악인으로 보이는 주인공이 이면의 선함과 함께 진정한 악을 극복하는 모습으로 관객의 공감을 얻는데 목표를 둔다. 결국, 악인을 조명했다기보다 또 다른 영웅의 탄생과 고난의 극복 과정을 재현한 것에 머문 것이다.

영화 '조커' 포스터.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조커' 스틸.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악인의 탄생 서사를 그려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원인을 사회 구조적 문제로 지목하려 하지 않은 것도 ‘조커’만의 색다른 매력이다. 지난 영화 속 사회 구조적 문제와 차별, 병폐 등에 내몰려 어쩔 수 없이 악인으로 화한 빌런(villain) 캐릭터들과 달리, 조커는 그저 인간성을 상실한 광기와 악 그 자체일 뿐이다.

일면 조커의 탄생이 사회 구조의 문제로 인한 필연이라는 듯 아서 플렉에게 가해지는 온갖 혐오의 시선과 압박이 그려지기도 한다. 사회적 약자 계층이 갖는 억눌린 분노를 적극적으로 스크린에 투사한 것이다. 만화를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 ‘조커’지만, 적어도 그 안에 담긴 사회와 약자의 분노는 판타지가 아니다. 냉정한 사회는 약자를 핍박하는 것을 넘어, 인간이 가진 존엄성을 앗아가고, 간신히 붙잡고 있던 작은 행복마저 위협한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서의 행보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조커로 변모한 이유를 사회로 미루기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첫 살인 후 해방감을 표현한 기괴한 춤사위부터, 타인과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채 남이 웃을 때 비로소 따라 웃는 모습까지, 아서는 사회에 섞이지 못한 채 정신병적 망상만을 일삼는 인물이다.

요컨대 사회 구조적 문제와 차별 따위가 아서 플렉을 조커로 내몬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커’는 이데올로기적 고통의 산물이 악을 탄생시킨다는 기존의 클리셰에서 벗어나, 악을 그저 악 그 자체로만 바라본다. 토드 필립스 감독의 이 음울한 세계관 속 악에는 어떤 신화도, 서사도, 가치도 내재돼 있지 않다. 앞서 언급하였듯 관객이 주인공과 공감하며 영화에 몰입할 수 있도록 아서를 향한 연민의 시선을 그려내는 듯 하기도 했지만, 조커는 그저 혼돈과 파괴를 갈망하는 사이코패스에 불과하다.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6 - 제다이의 귀환' 스틸.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6 - 제다이의 귀환' 스틸.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조커’는 악의 탄생을 조명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수많은 작품을 통해 활용되곤 했던 오이디푸스 신화를 비틀어 남다른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신화 속 오이디푸스는 가혹한 운명의 흐름 끝에 자신도 모르게 친부를 살해하는데, 이를 활용한 대표적인 영화로는 ‘스타워즈’를 꼽을 수 있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는 다스 베이더를 향해 자신의 광선검을 휘두르지만, 이내 그가 자신의 친부임을 알고 괴로워한다.

그와 달리 ‘조커’는 극 중 아서가 증오해마지 않던 아버지 토마스 웨인(브래트 컬렌)을 실제로 아서와 부자관계인지 알 수 없도록, 관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확실했던 ‘스타워즈’와 달리 ‘조커’의 아서 플렉과 토마스 웨인은 관객이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두 인물의 관계와 성격, 극 중 역할, 오이디푸스 신화를 차용했는지 여부 등이 모두 달라진다. 조커로 변모한 아서가 일으킨 폭동에 토마스 웨인은 목숨을 잃지만, 그것이 과거 내쳤던 아들의 복수인지, 휘몰아치는 광기에 휩싸인 사고인지는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결정된다.

영화 '조커' 스틸.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조커' 스틸.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못 가진 자들의 반란이 고담시를 덮치고, 이들을 이끌며 ‘자유의 여신’과 같이 숭배받는 조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영웅과 악당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모호한 캐릭터를 다양한 작품을 오마주하며 연출하기도 했다. 코미디언이 되고자 했으나 결국 공포로 화한 과정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코미디의 왕’(1983)을, 희비극이 뒤섞인 삶에 혼돈만이 가득한 장면들은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1936)를 연상시킨다.

허나 역시 ‘조커’를 마주하며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2008)다. 두 작품 모두 만화 속 캐릭터를 모티브로 히어로 장르의 형식을 취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실적인 세계가 존재한다. 자신이 갖고 있던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수용하며 각각 조커와 배트맨으로 화(化)하는 것 역시 유사한 구조를 띄고 있다.

영화 '조커' 포스터.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조커' 포스터.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하얗게 분칠한 얼굴 위로 파란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진다. 억울한 분노와 슬픔, 막연한 회한과 끝내 숨기지 못하는 광기가 뒤섞인 눈물을 마지막으로 아서는 사라진다. 오로지 조커만이 남아 무질서와 파괴를 노래한다. 조커는 그렇게 탄생한다. 조커의 탄생은 비단 한 개인의 타락에 머물지 않는다. 그가 야기하는 혼돈과 절망의 구렁텅이는 내재된 분노를 분출하고픈 이들의 마음을 먹고 더욱 자라난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조커 2’의 제작 가능성을 열어뒀다. 정신병원에 갇힌 아서가 들려주는 상상의 산물인지 실제인지 확언하기 힘든 1편을 지나 언젠가 누구보다 규정할 수 없고, 입체적인 인물인 조커가 다시금 우리 앞에 나타나길 고대한다.

개봉: 2019년 10월 2일/관람등급: 15세 관람가/출연: 호아킨 피닉스, 재지 비츠, 로버트 드 니로, 프란시스 콘로이, 브래트 컬렌, 쉐어 위햄/감독: 토드 필립스/수입·배급(국내):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러닝타임: 123분/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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