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무비= 김희주 기자] 최근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가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개봉하여 절찬리에 상영 중이다. 2000년에 개봉했던, 재개봉 영화임에도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머무르며 지금까지도 식지 않은 인기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 ‘화양연화’는 왕가위 감독 특유의 감각적 미장센과 연출, 그리고 90년대 홍콩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는 명작이다.
‘화양연화’를 연출한 왕가위 감독은 1988년 영화 데뷔 이후 현재까지 활동 중이지만, 그의 작품적 전성기는 1990~2000년대 초반까지라 평가받는다. 그는 영화 속에 1997년 홍콩 반환을 앞둔 시대적 상황을 잘 녹여내고, 독보적 미장센과 스타일리시한 연출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처럼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으로 인정 받는 왕가위 감독. 그의 대표적인 90년대 영화들을 꼽아봤다.
1. 아비정전(1990)

1988년 데뷔작 ‘열혈남아’ 이후 왕가위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아비정전’은 친어머니에게 버림받아 사랑을 믿지 못하는 바람둥이 남자 ‘아비(장국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감독의 페르소나로 꼽히는 장국영을 비롯해 장만옥, 유덕화, 양조위 등 당대 최고의 홍콩 스타 배우들이 출연한 작품이다.
영화는 한 남자의 쓸쓸한 인생과 그 주변 관계를 담고 있는데 자신을 길러준 양어머니가 있지만, 친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살아가는 ‘아비’의 불안한 심리를 통해 1997년 홍콩 반환을 앞둔 홍콩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를 은유적으로 잘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극 중 매표소에서 일하는 ‘수리진(장만옥)’은 ‘아비’와의 1분을 잊지 못해 그를 기다리지만, 친어머니를 찾아 필리핀으로 떠난 ‘아비’는 결국 돌아오지 못한다. 장국영뿐만 아니라 극 중 인물들이 모두 우울하고 고립된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모두 사랑하는 이로부터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화 ‘아비정전’ 속 인물들은 왕가위 감독 특유의 미장센과 연출로 더욱 고독하게 그려진다.
특히 ‘아비정전’은 국내에서 러닝셔츠를 입고 혼자 맘보 춤을 추는 장국영의 장면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이 외에도 ‘발 없는 새’ 혹은 ‘수리진’을 유혹하기 위해 ‘아비’가 했던 대사 등 명대사로도 많이 회자되는 작품이다.
2. 중경삼림(1994)


개봉 당시 국내에서 왕가위 감독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영화 ‘중경삼림’은 지금까지도 많은 시네필들에게 사랑받는 명작이다. 개봉 이후 30년 가까이 흘렀지만, 지금 보아도 그 특유의 세련된 미장센과 연출이 전혀 촌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 작품으로 왕가위 감독은 당시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으로도 명성을 떨치게 되는데, 영화는 감독의 타 작품들에 비해 대중적인 이야기를 난해하지 않게 담아내어 흥행에도 성공하였다.
또한, ‘중경삼림’은 이제는 찾기 힘든 90년대 홍콩의 매력을 영화 곳곳에 잘 배치한 작품으로도 꼽히며 마찬가지로 당시 홍콩인들의 불안정한 심리를 은유적으로 잘 담고 있다.
출연진은 양조위, 임청하, 금성무(가네시로 다케시), 왕페이로 2개의 에피소드를 옴니버스식으로 구성하여 연출하였다. 첫 번째 이야기는 ‘금발의 마약상(임청하)’과 여자친구와 헤어졌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경찰223, ‘하지무(금성무)’의 이야기다. 두 번째는 ‘하지무’가 자주 가는 가게의 점원 ‘페이(왕페이)’와 단골손님인 ‘경찰663(양조위)’의 이야기로,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섬세하게 잘 묘사되었으며 특히 영화 속 OST ‘California Dreaming’과 양조위의 등장 신이 유명하다.
최근 왕가위 감독은 영화의 후속작인 ‘중경삼림 2020’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구체적인 제작 일정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2036년 충칭을 배경으로 한 새로운 커플의 이야기가 펼쳐질 예정이라고 한다.
3. 타락천사(1995)


영화 ‘중경삼림’은 원래 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될 예정이었지만, 러닝타임 문제로 세 번째 에피소드는 별개의 영화로 개봉되었다. 그 영화가 바로 ‘타락천사’. ‘중경삼림’에 가려져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에 못지않은 세련미에 퇴폐미까지 더해져 왕가위식 미장센의 끝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호평 받은 스타일에 비해 줄거리의 진행이라던지 비교적 대중적이지 않은 면으로 인해 호불호가 갈리기도 한다.
영화에는 여명, 이가흔, 금성무(가네시로 다케시), 양채니, 막문위 등이 출연. 90년대 홍콩의 밤거리를 헤매며 방황하는 청춘들의 고독한 삶을 담고 있다.
이 영화 역시, 2개의 에피소드를 옴니버스식으로 구성한 작품으로 첫 번째 에피소드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고독한 킬러 ‘황지명(여명)’과 그의 ‘동업자(이가흔)’의 이야기. 두 번째 에피소드는 밤마다 남의 가게에 숨어들어 폭력적인 방법으로 장사를 하는 ‘하지무(금성무)’와 전 남자친구를 잊지 못하는 ‘찰리(양채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특히 영화 ‘중경삼림’에서 ‘경찰223’으로 출연했던 금성무는 ‘타락천사’에서 ‘죄수 번호 223’을 달고 등장, 그리고 어릴 적 파인애플을 많이 먹은 이후부터 말을 못 하게 된 캐릭터 설정까지 전작 ‘중경삼림’과의 연관성을 보여주며 극의 재미를 더한다.
4. 해피 투게더(1997)

1997년 개봉하여 그해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영화 ‘해피 투게더’는 왕가위 감독의 대표적인 페르소나 장국영과 양조위 주연의 작품이다. 영화는 ‘아휘(양조위)’와 ‘보영(장국영)’이 아르헨티나에서 겪는 절망적인 상황과 그 속에서 이어지는 두 사람의 관계를 담고 있다.
사랑하지만, 그렇기에 무너지는 두 남자의 관계는 아르헨티나라는 이국적인 배경 안에서 더욱 쓸쓸하게 묘사된다. 특히 영화 후반부, 홀로 이구아수 폭포를 찾는 양조위의 모습은 영화의 대표적인 명장면이다.
영화 ‘해피 투게더’는 사랑 앞에 진실한 두 사람의 모습을 담아내어, 보는 내내 퀴어영화임을 잊게 만든다. 성별이 같을 뿐, 여느 일반 연인들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 곳곳에 쓰인 OST는 이국적이지만 짙은 노스탤지어를 자아낸다.
홍콩 원제목은 ‘춘광사설’로 ‘구름 사이로 잠깐 비추는 봄 햇살’을 의미하며, 영어권과 국내에 알려진 영화명 ‘해피 투게더’는 함께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그럴 수 없는 관계를 역설적으로 담은 제목이라 할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놀랍게도 국내 첫 개봉 당시, 동성 간의 성행위 장면으로 인해 개봉 금지가 된 바 있다. 이후 2007년 재개봉 시, 무삭제판으로 상영되었다.
5. 화양연화(2000)

영화 ‘화양연화’는 사랑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서로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비밀스럽고 아름다운 시간을 그린 로맨스. 양조위와 장만옥이 주연을 맡아 열연을 펼쳤고 이 작품으로 양조위는 칸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같은 아파트에 살게 된 두 남녀는 각자 배우자가 있음에도 어떤 이유로 인해 가까워지며 애절한 사랑을 하게 된다. 영화의 제목이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절’을 뜻하듯이 영화는 두 남녀의 완숙한 사랑을 아름답게 담아냈다.
1962년, 홍콩의 한 아파트에서 서로의 배우자들이 불륜을 저지른 것을 알게 된 ‘주모운(양조위)’과 ‘소려진(장만옥)’. 두 사람은 같은 외로움으로 인해 가까워지며 가랑비에 옷 젖듯 서로에게 빠져든다. 하지만 사회적인 도덕적 잣대로 인해 두 사람은 이를 애써 외면하는데, 이와 같은 두 사람의 서사는 불륜임에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만든다.
이처럼 ‘화양연화’는 인생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 사랑과 이를 대하는 두 남녀의 모습을 진지하게 담아내며, 여기에 특유의 미장센과 감각적인 OST까지 더해져 지금까지도 왕가위 감독의 대표작으로 불린다. 특히 ‘화양연화’는 최근 BBC가 선정한 ‘21세기 가장 위대한 영화 2위’에 오르며 시대를 초월한 걸작임을 입증했다.

이처럼 최근까지도 왕가위 감독의 과거 영화가 회자되는 것은 20년이 넘는 시간에도 퇴색되지 않으며 많은 이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오기 때문일 터. 시대를 뛰어넘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는 지금도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