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우리 사이 거리감을 노래하는 詩 ‘정말 먼 곳’

2021-03-09 11:27 위성주 기자
    한 편의 시를 읽는 듯 짙은 여운 남기며
    먼 곳 떠난다 하여 해결될 수 있다면

[맥스무비= 위성주 기자]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하며 든 생각이 있다. 드라마가 소설과 같다면, 영화는 한 편의 시와 같다는 것이다. 여러 마음을 눌러 몇 마디 문장에 눌러 담아 여백과 충만을 동시에 전하는 시와 같이, 영화는 두 시간 이내의 짧은 시간에 수십, 수백 가지의 이미지를 겹치며 이야기를 전한다.

영화 ‘정말 먼 곳’은 그런 생각에 근거를 더하는 작품이다. 삶과 죽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까운 듯 멀기만 한 거리감, 얽히고설킨 인간관계 등 온갖 이야깃거리가, 115분이라는 짧은 시간 속 화천의 풍광과 함께 스크린에 수 놓였다. 늘어지는 설명 없이 오롯이 몇 마디 문장과 이미지만으로 ‘정말 먼 곳’은 영화라는 매체의 매력이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작은 화면이 극장을 대체할 수 없는지 여실히 증명한다.

영화 '정말 먼 곳' 스틸. 사진 그린나래미디어(주)
영화 '정말 먼 곳' 스틸. 사진 그린나래미디어(주)

사람에 지쳐 서울을 떠나온 진우(강길우). 그는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는 딸 설(김시하)과 함께 화천의 한 목장에 정착해 조용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남몰래 사랑을 키워왔던 오랜 연인 현민(홍경)이 그를 찾아오고. 진우는 현민과 행복한 일상을 보내면서도 남들에게 들키진 않을까 마음 깊은 곳에서 불안해 한다.

행복과 불안함 사이를 줄타기 하지만 여전히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던 진우. 매일이 오늘만 같기를 바라던 그에게 혼란함을 더한 누군가가 한 명 더 찾아온다. 설을 진우에게 맡긴 채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던 쌍둥이 여동생 은영(이상희)이 갑자기 찾아와 설을 데려가겠다는 것. 한 번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도미노처럼, 고요했던 진우의 일상은 그렇게 금이 가기 시작한다.

영화 '정말 먼 곳' 스틸. 사진 그린나래미디어(주)
영화 '정말 먼 곳' 스틸. 사진 그린나래미디어(주)

“우리 어디 멀리 가서 살까?”

극 중 현민이 이미 서울에서의 모든 인연을 끊고 남몰래 강원도 산골 목장에서 살아가던 연인 진우에게 한 대사다. 현민은 멀리 떠나 자신들만의 농장을 차리자는 희망 섞인 어조로 이야기 하나, 사실 그 말의 이면은 참으로 슬프다.

그들의 사랑을 매서운 혐오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들을 피해 더 깊고 먼 곳으로, 아무도 자신들을 모르는 어딘가로 떠나자는 이야기인 이유다. 그들은 서울을 떠나 자신들을 모르고, 사람도 몇 없는 강원도로 떠나왔지만, 여전히 남들과 같은 사랑을 꿈꾸는 것은 ‘욕심’이다.

영화 ‘정말 먼 곳’은 진우의 이 욕심을 통해 우리 사이의 거리감을 표현한다. 가까운 듯싶다가도 어쩌면 사소하기 그지없는 것 하나로 한없이 틀어지고 멀어져야만 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알 수 없는 거리감. 몸은 바로 앞에 있지만 도저히 가까워질 수 없는, 메워질 수 없는 구멍이 우리 사이에 있음을 영화는 힘 줘 노래한다.

영화 '정말 먼 곳' 스틸. 사진 그린나래미디어(주)
영화 '정말 먼 곳' 스틸. 사진 그린나래미디어(주)

영화는 인간 관계의 거리감으로부터 꺼져가는 생명과 탄생의 순간까지 그 영역을 확장하며 관객을 몰입시킨다. 진우와 현민의 사랑에 머물던 영화는 어느새 노인과 아이, 대안가족과 미혼모, 삶과 죽음, 불행과 행복 등 우리 사이 가까우면서도 멀기만 한 것들을 꺼내어 모두를 공감케 한다.

‘정말 먼 곳’이 그렇게 짙은 울림을 남길 수 있었던 것에는 카메라에 담아낸 인물 사이 거리감을 표현하는 여러 이미지들 덕이 크다. 인물의 표정으로, 두 사람 사이의 거리로, 비춰지지 않는 조명으로, 흐릿한 안개로, 때로는 인물 자체의 이미지로, 영화는 떠벌리는 여러 대사보다 많은 의미를 담아 관객에게 다가간다.

스크린에 가득 찬 화천의 풍광 역시 보는 이를 매료시키는 지점이다. 박근영 감독은 인공 조명을 최대한 배제한 채 자연의 빛을 최대한 활용했으나 일말의 투박함 없이 섬세하고 부드럽게 순간 순간을 그려냈다. 작은 화면으로는 느낄 수 없는 눈 앞을 완전히 채우는 아름다움이 카타르시스마저 자아내며 황홀한 감상을 남긴다.

영화 '정말 먼 곳' 스틸. 사진 그린나래미디어(주)
영화 '정말 먼 곳' 스틸. 사진 그린나래미디어(주)

상업 영화의 속도감과 긴장감이 넘치고, 음악이 귓가를 계속해서 채워주는 방식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심심하다고 평할 수 있겠다. 관객의 흔한 고정관념과 같이 독립 영화인 ‘정말 먼 곳’은 음악도, 대사도 적을뿐더러, 호흡 역시 느릿하다.

허나 그렇게 담백하고 차분히 흘러가기에 느껴지는 것 역시 존재한다. 어떤 것은 고요하기에 미소를 짓게 만들고, 고요하기에 불안함을 조성한다. 해질녘 침묵 속, 강가에 비춰진 사랑은 찰나의 순간 금빛으로 물들며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 폭설이 내리는 풍경과 그에 이어 작은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을 직접 담아낸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요컨대 ‘정말 먼 곳’은 어지러운 줄글이 아닌 한 편의 시를 읽는 듯한 감상을 나기는 작품이다. 감독의 고심이 엿보이는 여러 미장센과 촬영은 깊은 인상을 남기고, 삶과 죽음의 순환을 따라 흘러가는 좌절과 극복, 행복의 고리가 멀리부터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개봉: 3월 18일/관람등급: 12세 관람가/감독: 박근영/출연: 강길우, 홍경, 이상희, 기주봉, 기도영, 최금순, 김시하/제작: 영화사 행방, 봄내필름, 찰나/배급: 그린나래미디어㈜/러닝타임: 115분/별점: ★★★☆

위성주 기자 / whi9319@maxmovi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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