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th BIFF] ‘우연과 상상’ 리뷰…기묘하고 아름다운 내면의 형상

2021-10-08 12:48 위성주 기자

[맥스무비= 위성주 기자] 일본의 영화계를 이끌어갈 재목으로 불리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봉준호 감독이 깊은 애정을 표하기도 한다는 그의 영화 ‘우연과 상상’은 형식과 구성에 있어서 일반 관객들에게 다소 낯설 수 있다. 허나 그 낯섦을 아주 잠시만 접어둔다면, 어느새 그의 색다른 매력에 풍덩 빠져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영화 '우연과 상상'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사진 맥스무비
영화 '우연과 상상'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영화 ‘우연과 상상’(감독 하마구치 류스케)은 뜻밖의 만남에서 시작한 세 개의 이야기, ‘마법’, ‘문은 열어 둔 채로’, ‘한 번 더’로 구성된 작품이다. 마치 하마구치 감독이 집필한 단편 소설을 엮은 단편집과 같다. 일종의 옴니버스 영화인데, 각기 다른 내용의 이야기로 꾸려졌음에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면 하나의 관통된 주제가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고민에 빠져들게 한다.

영화 '우연과 상상' 中 '마법' 스틸. 그린나래미디어
영화 '우연과 상상' 中 '마법' 스틸. 그린나래미디어

첫 번째 이야기 ‘마법’은 우연히 만난 남자와 한눈에 반했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다가, 그 남자가 2년 전 헤어진 전 남자친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자의 심경을 스크린에 담았다. 꽤나 도발적인 이야기다. 물론 여느 로맨틱 코메디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지만, 주인공의 행동은 사뭇 다르다. 스포일러가 될까 더 이상의 설명은 어렵지만, ‘마법’은 전에 없던 파격으로 관객에게 놀라움을 안긴다.

영화의 연출적인 측면에서도 영화는 꽤나 남다른 남상을 안긴다. 거칠게 들어가는 클로즈업은 얼핏 홍상수 감독이 연상되기도 하고, 택시 안에서 길게 이어지는 대화는 하마구치 감독의 스승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과 누벨바그의 거장 에릭 로메르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와 동시에 영화는 하마구치 감독만의 색으로 관객을 물들인다. 제2의 구로사와 기요시 따위가 아닌, 그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으로만 그가 불릴 수 있는 이유다.

영화 '우연과 상상' 中 '문은 열어둔 채로' 스틸.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영화 '우연과 상상' 中 '문은 열어 둔 채로' 스틸.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두 번째 이야기 ‘문은 열어 둔 채로’ 역시 흥미롭다. 깐깐한 교수에게 낙제를 받아 취업에 실패한 한 남학생이, 자신의 섹스 파트너에게 교수를 유혹해달라는 부탁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여성은 어쩌면 재미로, 어쩌면 성격적인 결함으로 그 부탁을 뿌리치지 않고, 교수를 유혹해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다가간다. 그렇게 교수의 연구실에서 벌어지는 대담은 참으로 외설적이다.

교수의 것일지, 여자의 것일지, 하마구치 감독의 것일지, 혹은 관객의 것일지 모를 기묘한 흥분이 분위기를 압도한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는 조금도 끈적이지 않고 되레 건조하다. 건조하다 못해 까칠하다. 유혹과 함정으로 다가간 여성은 건조함 속에서 구원과 희망을 얻는데, 그 결말이 참으로 통쾌하다. 눈에 가해지는 피로함 없이 진득한 대사 만으로 관객의 심장을 움켜쥐는 것은 하마구치 감독의 특출난 재능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영화 '우연과 상상' 中 '한 번 더' 스틸.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영화 '우연과 상상' 中 '한 번 더' 스틸.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세 번째 이야기도 물론 그렇다. 한 레즈비언 여성이 고등학생 시절 사귀었던 동창과 20년 만에 만나 벌어지는 마음이 스크린에 그려진다. 어쩌면 영화의 제목 ‘우연과 상상’은 이 세 번째 이야기를 지칭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영화는 우연과 상상에 기반해 진행된다. 우연은 쉽게 바스러지고, 상상은 한 순간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한 번 더’는 그리 편히 관객을 놓아주지 않는다.

우연을 필연으로, 상상을 현실로 끌어내리며 보는 이를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단숨에 몰아넣는다. 어쩌면 황당하기도, 다소 투박하기도 하다. 그렇게 관객은 영화에 거리를 두게 되지만, 생겨난 거리만큼 각자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더욱 깊은 공감이 이뤄진다. 영화는 하마구치 감독의 전작 ‘해피 아워’와 ‘아사코’를 다시금 소환하기도 한다. 그의 팬이라면 ‘우연과 상상’이 괜스레 반가울 터다.

영화 '우연과 상상' 포스터.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영화 '우연과 상상' 포스터.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색이 다른 세 단편은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를 다룬다. 우연을 통해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인 인생의 아이러니를, 상상을 통해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그러나 참으로 잔혹한 세상의 형상을 비춘다. 어쩌면 지나치게 현학적인 이야기다. 뜬 구름 잡는 소리라 평한들 변명할 수 없다. 그러나 그를 향유하고, 맛보고, 즐기기에 예술은 존재하고, 사람들은 영혼의 자유를 얻는다. 하마구치 감독의 ‘우연과 상상’은 예술적 영감의 발판이자, 훌륭한 놀이다.

개봉: 미정/관람등급: 15세 이상관람가/감독: 하마구치 류스케/출연: 시부카와 키요히코, 모리 카츠키, 우라베 후사코, 카와이 아오바/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러닝타임: 121분/별점: ★★★★

위성주 기자 / whi9319@maxmovi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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