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X 인터뷰] ‘온 세상이 하얗다’ 김지석 감독 “죽음과 관계에 대하여”

2022-02-09 17:27 맥스무비취재팀 기자
    “두 주인공은 내가 만나온 이상한 사람들의 복합체”
    “쓸쓸하지만 담백하고, 엉뚱하지만 여운이 남는 영화로 기억되길”

[맥스무비= 맥스무비취재팀 기자] 영화 ‘온 세상이 하얗다’를 연출해 장편 데뷔를 알린 김지석 감독과 만났다.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마주한 그는 얼핏 영화에 가득한 음울한 분위기와는 정 반대의 첫인상을 남겼다. 장발이지만 깔끔하게 뒤로 넘긴 올백머리와 반짝이는 귀걸이는 ‘온 세상이 하얗다’의 담백함보단, 세련됨을 떠올리게 했다. 영화와 감독의 분위기가 구태여 같을 필요는 없지만 이다지도 큰 괴리는 낯선 것이었다. 김지석 감독은 과연 어떤 이유와 사연이 있어 시작부터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게 됐을까.

영화 '온 세상이 하얗다' 김지석 감독. 사진 트리플픽쳐스
영화 '온 세상이 하얗다' 김지석 감독. 사진 트리플픽쳐스

제목의 의미부터 묻고 싶다. 그저 눈 내리는 장면을 연상시키지만은 않는데

= 일차적인 이유는 원래 영화의 제목을 ‘태백’으로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모두 촌스럽다고 말려서 그만뒀지만, ‘태백’이라는 제목이 난 참 마음에 들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태백시 홈페이지를 들어가보니 도시 이름에 대해 뜻풀이를 한 것이 ‘온 세상이 하얗다’는 것이었다. 보자마자 제목으로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릭터 사이 관계 역시 하얗다는 느낌이 있어서 그 제목이 좋았던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가 스스로의 세계가 있고, 타인에게 결코 이해 받을 수 없는 지점들이 있다. 그럼에도 옆에 누군가 있는 것이 좋은 것은 구태여 누군가 나를 이해하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저 내 옆에 누군가 있어주는 것 그 자체가 좋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관계도 그렇다. 두 사람의 관계는 검은색은 아니지만 어떤 색을 띄고 있지도 않다. 무채색에 가까운 하얀색이다. 순백의 느낌보다는 뿌얘서 잘 보이지 않는 느낌일 것이다. 그래서 제목 ‘온 세상이 하얗다’가 잘 맞았다고 생각한다.

영화 '온 세상이 하얗다' 스틸. 사진 트리플픽쳐스
영화 '온 세상이 하얗다' 스틸. 사진 트리플픽쳐스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로드무비다. 죽음을 내세운 이유는 무엇인가

= 이 영화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죽음이 마냥 무겁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려 했다. 두 사람이 죽으로 간다는 이야기가 내게는 슬프거나 비극적이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두 사람의 모습이 엉뚱하고 유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두 캐릭터 모두 내면이 텅 비어있는 사람들인 이유다.

그들은 이미 삶에 대한 욕구가 거세된 사람들이고, 그런 이들은 이 세상에 분명히 살아가고 있다. 삶의 원동력은 내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들과 소중하다고 여기는 믿음 덕에 생기기 마련인데, 그런 원동력이 없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죽음은 일상의 또 다른 단계일 뿐이다. 결국 ‘이렇게 생각하는 죽음도 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김모인과 류화림의 캐릭터는 독특하다. 방금 내면의 무언가가 거세된 이들이라 표현했는데, 어떻게 떠올리게 된 것인가

= 김모인과 류화림, 모두 현실에 있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내가 살면서 만나온 이상한 사람들의 복합체다. 언젠가 조선소에서 일하며 만났던 알코올 중독자가 김모인의 모티브가 됐고, 우울증과 허언증이 심했던 이가 류화림이 됐다. 물론 다만 이런 사람들이 같이 여행을 떠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모든 관계는 아무리 옅어도 책임과 의무가 따르기 마련인데, 그런 것에서 완전히 벗어난 이 두 사람이 여행을 떠나는 것은 어쩌면 내가 그리하길 바라는 이유일 수도 있겠다.

영화 '온 세상이 하얗다' 스틸. 사진 트리플픽쳐스
영화 '온 세상이 하얗다' 스틸. 사진 트리플픽쳐스

CF 감독 출신이라면 으레 떠올리게 되는 ‘스타일리쉬’함과는 거리가 있다. 되레 담백한 연출이 돋보였다. 의도한 바가 있는지

= 아무래도 내 취향인 것 같다. 모든 앵글에 의도를 갖고 감정을 뽑아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직은 부족한 듯 하다. 그저 왜 인지 모르겠으나, 멀찍이 떨어져 있는 샷, 표정은 잘 안 들려도 대화는 잘 들리는 정도의 거리감이 좋았다. 다만 자연 풍광을 더 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촬영 회차만 여유가 됐다면 풍광을 더 많이 찍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풍광을 만나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세상이 참 아름답다’하는 생각부터 ‘왜 이렇게 예쁘게 보일까’하는 생각도 든다. 내게는 그런 자연들이 경이롭고, 신적이며, 영감을 준다. 그런 풍광과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스크린에 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물론 바람처럼 되긴 어렵더라(웃음). 함께했던 촬영 감독님은 ‘취화선’(2002)을 찍으시면서 자연 풍광 인서트만 수개월을 찍었다던데, 그게 참 부럽더라.

‘까마귀 숲’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가상의 공간은 어떻게 떠올리게 됐나

= 내 아버지의 이야기, 아버지의 트라우마로부터 시작된 공간이다. 아버지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태백에서 일하신 적이 있는데, 탄광에 직접 들어가진 않고 통나무를 산 위에 올리는 일을 했었다. 당시 실제로 이주에 한번 정도 인명사고가 났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시체가 매주 실려나가고, 아내와 아이들은 심장을 졸이고 있는 모습을 보셨단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어릴 때는 태백이 마냥 무서웠었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태백을 가보니 그런 무서운 이미지와는 조금 달랐다. 사방이 산인 곳에 도시가 있어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덕분에 ‘까마귀 숲’이라는 환상적인 공간을 떠올릴 수 있던 것 같다. 가족을 잃었던 슬픔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이 슬픔에 못 이겨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는 그런 공간이 괜스레 있을 법 했다.

영화 '온 세상이 하얗다' 스틸. 사진 트리플픽쳐스
영화 '온 세상이 하얗다' 스틸. 사진 트리플픽쳐스

영화의 개봉을 앞뒀다. 소감이 어떤가. 그리고 영화가 관객들에게 어떻게 비춰지길 바라나

= 큰 목표나 욕심을 갖고 시작한 영화는 아니었다. 그저 소중한 경험이었고 귀중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정도였는데, 좋은 기회가 생겨 극장 개봉까지 하게 됐다. 내게는 참 꿈만 같은 일이고, 즐거울 뿐이다. 앞으로도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 같다. 특히 모든 스태프들과 배우들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이 영화는 특정한 이야기나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는 아니다. 그저 겨울과 잘 어울리는, 쓸쓸하지만 담백하고, 엉뚱하지만 여운이 남는 무드를 전달하고자 했다. 영화를 보면 느껴지는 기분 그대로 영화를 봐주셨으면 한다.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여전히 웃곤 한다. 나 혼자만의 재미있는 이야기일 수도 있어 두렵지만,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를 봐주시길 바란다.

#영화 기본 정보

영화 ‘온 세상이 하얗다’(2021)는 우연히 만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죽기 위해 태백 까마귀 숲으로 떠나는 기이한 동행을 그렸다. ‘바람의 나라’, ‘롯데렌터카’, ‘빙그레’, ‘에이블리’ 등 다수의 CF를 기획, 연출한 김지석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다. 지난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과 제20회 전북독립영화제 국내경쟁-장편 부문에 이름을 올려 평단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주연은 독립영화계를 대표하는 두 연기파 배우인 강길우와 박가영이 맡았다. 10일 극장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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