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무비= 박미애 기자] "좋아졌다" "괜찮다"며 앞선 보도로 알려진 내용은 빈말이 아니었다. 한눈에 봐도 얼굴은 환했고, 눈에 띄게 건강한 기운이 맴돌았다. 6개월여 전만 해도 부은 얼굴과 가발로 팬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던 사실을 떠올리면 더욱 그랬다. 백발 외에 예전 얼굴을 거의 회복한 모습이었다.

혈액암 투병 중인 '국민배우' 안성기(71)가 9일 오후 자신이 2010년부터 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서울 중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사무실에서 검은색 터틀넥 티셔츠와 베이지색 카디건 차림으로 예의 따스한 미소와 함께 <맥스무비> 취재진을 맞아들였다. 건강은 어떠냐고 안부를 묻자 그는 “목소리만 빼고 몸은 90% 정도 회복됐다"고 웃으며 말했다.
실제로 밝은 얼굴빛이 그의 건강 상태를 짐작하게 했다. 생각보다 빠른 회복은 운동 덕분인 듯했다. 그는 여전히 하루 한 차례 웨이트트레이닝센터를 찾아 트레드밀(러닝머신) 30분, 웨이트 30분 등 매일 1시간씩 운동을 한다. 3월부터는 골프 라운딩도 시작했다. "두 번 정도 나갔다 왔는데 자세가 완전히 망가졌다"며 아쉬워하지만 건강을 되찾기 위한 그의 의지는 지워내지 못했다.
● "공기처럼 있는듯 없는듯 평범하게 여겼으면..."
안성기는 2020년 10월 초 쓰러졌다. 병원에서 받은 진단은 혈액암. 당시 주연 영화 '종이꽃' 홍보 활동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투병 중에도 '카시오페아' '한산:용의 출현' '탄생' 등 다른 작품의 촬영까지 마쳤다. 이듬해 5월에는 영화 '아들의 이름으로' 홍보 활동을 위해 잠깐 외출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랜 친구였던 고 이춘연 씨네2000 대표가 세상을 떠난 이후 한동안 외부 활동을 삼갔다.
안성기는 배우들의 맏형으로 오랜 시간 영화계 안팎의 대소사를 두루 챙겨왔다. 하지만 "배우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며 "공기처럼 있는듯 없는듯 평범하게 여겼으면 좋겠다"면서 영화 관련 각종 행사에 참여하면서도 대우를 받거나 도드라져 보이기를 꺼렸다. 그래서 늘 거기 있을 거라 생각해온 안성기의 빈자리는 팬들은 물론 많은 영화관계자들에게도 너무나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2022년 9월 '배창호 감독 특별전'을 통해 공식석상에 참석했다. 얼굴이 붓고 살이 찌는 등 사뭇 달라진 모습이 팬들에게 안타까움을 안겼다. 그 때문에 한동안 외부 활동을 삼가왔을 터. 충분히 회복하지 못한 몸 상태로 공개적인 자리에 나서는 것이 그로서도 쉽지만은 않았다.
"치료가 어느 정도 끝났고, 더 이상 숨어 있는 건 아닌 것 같았지. 그냥 자연스럽게 하는 게 낫다 싶어서 갔는데, (김)보연이가 울어서…."
안성기는 당시 상황이 떠올랐는지, 말을 끝까지 매듭짓지 못했다. 생략된 말에는 '나 때문에 미안했지'가 담겨 있는 듯했다.
투병 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건 조혈모세포 이식 과정이었다.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외부와 단절된 채 홀로 병마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혔다. 그때 TV가 좋은 친구가 돼줬다. 배우답게 영화를 많이 찾아 봤다고 했다.
"병원에서도 그렇고 집에서도 그렇고, TV가 좋은 낙이었지. 평소에 잘 안 보는, 재미없게 느껴져서 안 봤던 영화들을 오히려 골라서 본 것 같아."
왜 그런 영화를 봤느냐는 질문에, 그는 "아프면 시간이 잘 안 가거든. 평소 보지 않던 영화들을 보니까 시간이 잘 가더라고"라며 웃었다.
안성기는 '배창호 감독 특별전' 이후 예전처럼 꾸준히 공식석상에 나서고 있다. 그때마다 호전된 모습으로 동료와 팬들을 안심시키고 있다.
최근에는 4·19민주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돼 시상식에 참석했고, 고 강수연 1주기 추모전에도 참석했다. 4.19민주평화상을 수상하게 될지 몰랐다는 그는 “신영균 감독·배창호 감독·김동호 위원장·가수 김수철·배우 박중훈 그리고 아들(안필립씨)이 함께 해준 덕분에 편안하게 다녀왔다”는 그는 믿고 의지했던 동료를 먼저 떠나보낸 것에 대한 착잡함도 드러냈다. "수연이는 나한테는 여배우가 아니었어. 그냥 영화를 같이 하는 친구였지"라는 말에서는 전우를 잃은 것 같은 상실감이 묻어났다.

● "다 그렇지는 않지만 시간이 약일 때가 있다"
안성기는 올해로 데뷔 66년을 맞았다. 연기 경력으로만 태어난 간지의 해가 다시 돌아오는 환갑을 넘겼다. 그는 5세 때 아버지의 친구인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에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중학교 때까지 촬영장에서 살다시피했던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연기와 무관한 삶을 살았다고 했다. 군대 전역을 한 뒤에도,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날'에 출연하고 지금의 '국민배우 안성기'가 될 줄은 그역시 알지 못했다.
아역배우들이 겪는 성장통을 겪어본 적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군 전역 때까지 영화를 안 했으니까"라며 "내 경우에는 그 시기에 연기를 안한 것이 ('바람불어 좋은 날'에 출연한 후) 새로운 신인이 나타났다라는 느낌을 줘서 훨씬 좋은 결과로 이어졌던 것 같다"며 "다 그렇지는 않지만 시간이 약일 때가 있다"고 덧붙였다.
안성기가 지금까지 출연한 작품은 대략 170여편에 달한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 뭐가 있느냐는 질문에 한참 생각하던 그는 '바람 불어 좋은 날' '깊고 푸른 밤' '라디오스타'를 꼽았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아역배우의 이미지를 씻어내고 안성기라는 신인배우의 탄생을 알려준 작품이고, '깊고 푸른 밤'은 스스로를 멋있게 나왔다고 여기는 작품이다.
그리고 '라디오 스타'는 안성기가 가장 아끼는 후배 박중훈과 출연한 작품이다. 한물간 스타와 매니저의 우정을 그린 '라디오스타'에서 매니저 박민수를 연기한 그는 "지금의 나 같아서"라는 답변으로 애정을 담아냈다.
그렇게 평생을 영화와 함께해왔고, 아프면서도 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당연히 현장이 그리울 것이다.
"아무래도 하고 싶지. 몸은 거의 회복했고, 목소리도 올해 말쯤에는 다 나을 테니, 그러면 내년에는 다시 현장에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시나리오도 받고 있어. 하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