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카이거

Chen Kai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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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08-12 출생ㅣ중국 북경ㅣ황토지(84) 데뷔
‘첸 카이거’ 감독은 1952년 북경에서 영화감독인 아버지와 시나리오 작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영화에 대한 관심과 모택동주의 사상 속에 자라났다. 1966년 베이징 4중학교 1학년을 마친 그는 문화 대혁명이 일어나자 홍위병이 되었다가 윈난성에 가 벌목과 군인 생활을 하기도 한다. 1975년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3년 동안 북경 영화 현상소에서 일하던 그는 1978년 북경 영화 학교가 다시 문을 열자 감독과에 들어가 연출 공부를 했다. 이때부터 감독으로서의 그의 본격 영화인생은 시작된다. 그곳에서 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유일한 미학적 원리로 떠받들던 이전 감독들과는 달리 유럽의 작가 영화를 두루 섭렵하며 사회주의 이전의 중국 영화를 새롭게 발견했다. 졸업 후 3년간의 조감독 생활을 한 그는 어렵게 제작팀을 꾸려 데뷔작 <황토지>를 완성했다. 한때 사진 작가로 활동하고 북경 영화 학교에서 촬영을 전공한 동기 ‘장이모우’ 감독이 촬영 감독으로 처음으로 발탁된 저예산 영화 <황토지>는 홍콩영화제에 공개되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중국 영화의 대발견’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1985년 로카르노 국제 영화제 은표범상과 특별언급상, 하외이 국제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황토지>는 ‘첸 카이거’ 감독에서 시작된 중국 제5세대 감독의 출현을 알린 신호탄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정부에 의해 중국 내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다. 두번째 작품인 <대열병> 역시 상영 금지 처분을 받아 중국 내에서 대중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대열병> 역시 몬트리올 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수상 등 해외의 찬사가 쏟아졌다. 그리고 1988년에는 문화대혁명 기간동안 겪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영화인 <아이들의 왕>으로 깐느 황금종려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두고 중국 정부와의 마찰은 계속되었다. 결국 천안문 사태 이후 미국 대학의 객원 교수 요청을 받아들여 뉴욕으로 간 그는 자신을 환대해주는 그 곳에서 ‘듀란 듀란’의 뮤직비디오 제작 등 여러 활동을 펼쳤다. 그 후 3년 만에 중국에 돌아온 그는 해외 자본으로 <현 위의 인생>을 완성해 다시 한번 깐느 황금종려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하지만 <현 위의 인생>은 그의 그 전작들과 달리 압도적인 영상미로 전통과 미학 사이의 정교한 접근을 시도했다. 이 때부터 ‘첸 카이거’ 감독의 오리엔탈리즘을 향한 여정은 예감되었다. 그리고 1992년엔 <패왕별희>로 깐느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비평가상을 받으므로써 자신의 영화 이력과 중국의 영화사를 다시 썼다. <패왕별희>로 비평적인 성공과 동시에 큰 상업적인 성공도 얻은 ‘첸 카이거’ 감독은 1996년 거대 자본을 들여 <풍월>을 완성한다. <풍월>은 중국 내 상영금지 처분을 당했지만 깐느 영화제에 초청되어 작품성은 인정받았다. 하지만 1997년 중국 최대의 제작비를 들인 <시황제 암살>는 대중에게 외면당했다. 이후 중국 ‘세가영웅 영화 투자회사’의 예술 총감독직을 맡는 등 중국 영화 산업 활성에 힘쓰던 그는 2002년 미국으로 건너가 영어로 <킬링 미 소프틀리>를 연출했다. 이 새로운 시도는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첸카이거 감독의 영화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 정신을 보여주었다. 이후 , ‘짐 자무쉬’, ‘스파이크 리’, ‘빔 밴던스’, ‘아키 카우스키마키’, ‘베르그너 헤이조그’, ‘빅토 에리스’ 등 세계의 거장 6명의 감독과 함께 한 프로젝트 영화 <텐미니츠 트럼펫>에서 <깊게 숨겨져 있는 백송이 꽃 100 Flowers Hidden Deep"> 부분을 연출, 세계적 감독으로서의 위상을 재확인하기도 했다. ‘첸 카이거’ 감독은 데뷔 이후 지금까지 사회 비판적인 저예산 영화, 거대 자본을 투입한 스케일 큰 영화, 중국에서 해외 자본으로 만든 영화, 해외에서 직접 제작한 영화 등 끊임없는 열정과 용기로 새로운 영화적 시도를 계속 해왔다. 이를 통해 그가 얻은 결론은 결국 자신의 영화 터전은 중국이고 중국에서 영화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중국 영화시장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술 영화만 하라고 하는 것은 독재라고 주장하며 중국 시장의 상업 영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던 그가 <투게더>를 들고 중국 대중의 품으로 돌아왔다. ‘첸 카이거’ 감독의 위상을 다시 한번 공고히 한 <투게더>의 성공은 이제 중국 국경을 넘어 세계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제50회(2002)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감독상 - 투게더 제19회(1993) LA 비평가 협회상 외국어영화상 - 패왕별희 제48회(1996) 깐느 영화제 초청작 - 풍월 제46회(1993)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 - 패왕별희 제44회(1991) 1991년 깐느영화제 황금 종려상에 노미네이트 - 현위의 인생 제40회(1987) 1988년 깐느영화제 황금 종려상에 노미네이트 - 아이들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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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08-12 출생중국 북경황토지(84) 데뷔
‘첸 카이거’ 감독은 1952년 북경에서 영화감독인 아버지와 시나리오 작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영화에 대한 관심과 모택동주의 사상 속에 자라났다. 1966년 베이징 4중학교 1학년을 마친 그는 문화 대혁명이 일어나자 홍위병이 되었다가 윈난성에 가 벌목과 군인 생활을 하기도 한다. 1975년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3년 동안 북경 영화 현상소에서 일하던 그는 1978년 북경 영화 학교가 다시 문을 열자 감독과에 들어가 연출 공부를 했다. 이때부터 감독으로서의 그의 본격 영화인생은 시작된다. 그곳에서 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유일한 미학적 원리로 떠받들던 이전 감독들과는 달리 유럽의 작가 영화를 두루 섭렵하며 사회주의 이전의 중국 영화를 새롭게 발견했다. 졸업 후 3년간의 조감독 생활을 한 그는 어렵게 제작팀을 꾸려 데뷔작 <황토지>를 완성했다. 한때 사진 작가로 활동하고 북경 영화 학교에서 촬영을 전공한 동기 ‘장이모우’ 감독이 촬영 감독으로 처음으로 발탁된 저예산 영화 <황토지>는 홍콩영화제에 공개되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중국 영화의 대발견’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1985년 로카르노 국제 영화제 은표범상과 특별언급상, 하외이 국제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황토지>는 ‘첸 카이거’ 감독에서 시작된 중국 제5세대 감독의 출현을 알린 신호탄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정부에 의해 중국 내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다. 두번째 작품인 <대열병> 역시 상영 금지 처분을 받아 중국 내에서 대중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대열병> 역시 몬트리올 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수상 등 해외의 찬사가 쏟아졌다. 그리고 1988년에는 문화대혁명 기간동안 겪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영화인 <아이들의 왕>으로 깐느 황금종려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두고 중국 정부와의 마찰은 계속되었다. 결국 천안문 사태 이후 미국 대학의 객원 교수 요청을 받아들여 뉴욕으로 간 그는 자신을 환대해주는 그 곳에서 ‘듀란 듀란’의 뮤직비디오 제작 등 여러 활동을 펼쳤다. 그 후 3년 만에 중국에 돌아온 그는 해외 자본으로 <현 위의 인생>을 완성해 다시 한번 깐느 황금종려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하지만 <현 위의 인생>은 그의 그 전작들과 달리 압도적인 영상미로 전통과 미학 사이의 정교한 접근을 시도했다. 이 때부터 ‘첸 카이거’ 감독의 오리엔탈리즘을 향한 여정은 예감되었다. 그리고 1992년엔 <패왕별희>로 깐느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비평가상을 받으므로써 자신의 영화 이력과 중국의 영화사를 다시 썼다. <패왕별희>로 비평적인 성공과 동시에 큰 상업적인 성공도 얻은 ‘첸 카이거’ 감독은 1996년 거대 자본을 들여 <풍월>을 완성한다. <풍월>은 중국 내 상영금지 처분을 당했지만 깐느 영화제에 초청되어 작품성은 인정받았다. 하지만 1997년 중국 최대의 제작비를 들인 <시황제 암살>는 대중에게 외면당했다. 이후 중국 ‘세가영웅 영화 투자회사’의 예술 총감독직을 맡는 등 중국 영화 산업 활성에 힘쓰던 그는 2002년 미국으로 건너가 영어로 <킬링 미 소프틀리>를 연출했다. 이 새로운 시도는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첸카이거 감독의 영화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 정신을 보여주었다. 이후 , ‘짐 자무쉬’, ‘스파이크 리’, ‘빔 밴던스’, ‘아키 카우스키마키’, ‘베르그너 헤이조그’, ‘빅토 에리스’ 등 세계의 거장 6명의 감독과 함께 한 프로젝트 영화 <텐미니츠 트럼펫>에서 <깊게 숨겨져 있는 백송이 꽃 100 Flowers Hidden Deep"> 부분을 연출, 세계적 감독으로서의 위상을 재확인하기도 했다. ‘첸 카이거’ 감독은 데뷔 이후 지금까지 사회 비판적인 저예산 영화, 거대 자본을 투입한 스케일 큰 영화, 중국에서 해외 자본으로 만든 영화, 해외에서 직접 제작한 영화 등 끊임없는 열정과 용기로 새로운 영화적 시도를 계속 해왔다. 이를 통해 그가 얻은 결론은 결국 자신의 영화 터전은 중국이고 중국에서 영화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중국 영화시장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술 영화만 하라고 하는 것은 독재라고 주장하며 중국 시장의 상업 영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던 그가 <투게더>를 들고 중국 대중의 품으로 돌아왔다. ‘첸 카이거’ 감독의 위상을 다시 한번 공고히 한 <투게더>의 성공은 이제 중국 국경을 넘어 세계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제50회(2002)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감독상 - 투게더 제19회(1993) LA 비평가 협회상 외국어영화상 - 패왕별희 제48회(1996) 깐느 영화제 초청작 - 풍월 제46회(1993)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 - 패왕별희 제44회(1991) 1991년 깐느영화제 황금 종려상에 노미네이트 - 현위의 인생 제40회(1987) 1988년 깐느영화제 황금 종려상에 노미네이트 - 아이들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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