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로 알모도바르

Pedro Almodovar 

221,579관객 동원
 1949-09-24출생ㅣ스페인ㅣ산 정상의 페피, 루시, 봄 그리고 다른 많은 여자들
라 만차의 중심부인 시우다드레알지방의 칼자다 드 칼라트라바에서 태어났으며, 여덟 살에 가족들과 함께 에르뜨레마두라로 이주, 그곳에서 살레시안 신부들과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이 가르치는 학교를 다녔다. 16살에 영화를 만들겠다는 일념 하에 무일푼으로 마드리드로 온다. 그러나 프랑코 정권 하에 영화 학교는 폐쇄되었고, 당시 나라를 옭아매던 독재에도 불구, 시골 출신의 이 청년에게 마드리드란 문화와 독립과 자유의 상징이자 예술과 삶의 용광로와 다름없었다. 여러 가지 잡일을 하다가 스페인 전화국에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갖게 되자 수퍼 8미리 카메라를 샀다. 그 후 전화국에서 사무 보조로 12년 동안 일을 했고 그 12년 동안 그는 영화감독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그를 완성시켜줄 다양한 활동에 매진했다. 아침에는 전화국에서 스페인 중산층의 소문과 스캔들 등 미래의 이야기꾼에게 있어서는 금광과도 같은 소중한 지식을 얻었고 저녁이면 글을 쓰고 연애를 했다. Los Goliardos와 함께 연극을 공연하고, 수퍼 8미리 비디오 카메라로 영화를 만들었고, 단편을 기고하고 출판하였다. 그는 ‘Almódovar and McNamara’ 라는 풍자적인 펑크 락 그룹의 멤버이기도 했다. 1980년에 일년 반 동안 16미리로 힘들게 작업한 <산정상의 페피, 루시, 봄, 그리고 다른 많은 여자들>(80)이라는 영화가 개봉하였다. 이 첫 번째 상업영화는 성공적이었으며 배우와 스탭들의 협조로 만들어진 전위 영화였던 이 영화에서 카르멘 마우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처음 영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1986년, 동생 아구스틴과 함께 그는 El Deseo S.A 라는 제작사를 설립, 첫 번째 프로젝트로 <욕망의 법칙>(86)을 제작하였다. 1988년 <신경 쇠약 직전의 여자>(87)가 토론토 영화제 관객상과 베니스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의 영화들은 전 세계에 개봉되었다. 1999년에는 그에게 다시 한번 화려한 명성을 안겨준 작품 <내 어머니의 모든 것>(99)으로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과 골든 글로브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고, 세자르, 유러피안 필름 어워드, 다비드 디 도나텔로, BAFTA, 고야 어워드를 휩쓸며 45개상 수상을 기록했다. 3년 뒤, <그녀에게>(01)로 돌아온 그에게 또다시 아카데미 각본상, 유러피안 필름 어워드에서 5관왕, BAFTA에서 2관왕, 세자르 영화제를 비롯 유수의 영화제에서 열띤 찬사와 수상의 영광이 이어졌다. 2004년에는 <나쁜 교육>이 칸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으며, 2006년에는 <귀향>으로 칸 영화제 각본상과 단체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그의 영화는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경이적인 흥행을 기록한다.

-<내가 사는 피부> 보도자료 중에서-

1999년 <내 어머니의 모든 것>으로 깐느 영화제 감독상과 타임지 선‘1999 올해의 10대 영화’ 1위로 뽑히며 세계적인 거장으로 평가받는 감독. 독특한 색채 감각과 성적인 유머,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알모도바르 스타일’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 대중성과 예술성을 적절히 혼합하여 새로운 차원의 미학을 만들어 내는 알모도바르 감독은 카를로스 사우라와 함께 스페인 영화의 커다란 기둥으로 우뚝 서있다. 2002년에는 <그녀에게>를 통해 그의 영화 세계가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는 찬사를 한몸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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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09-24 출생스페인산 정상의 페피, 루시, 봄 그리고 다른 많은 여자들 데뷔
라 만차의 중심부인 시우다드레알지방의 칼자다 드 칼라트라바에서 태어났으며, 여덟 살에 가족들과 함께 에르뜨레마두라로 이주, 그곳에서 살레시안 신부들과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이 가르치는 학교를 다녔다. 16살에 영화를 만들겠다는 일념 하에 무일푼으로 마드리드로 온다. 그러나 프랑코 정권 하에 영화 학교는 폐쇄되었고, 당시 나라를 옭아매던 독재에도 불구, 시골 출신의 이 청년에게 마드리드란 문화와 독립과 자유의 상징이자 예술과 삶의 용광로와 다름없었다. 여러 가지 잡일을 하다가 스페인 전화국에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갖게 되자 수퍼 8미리 카메라를 샀다. 그 후 전화국에서 사무 보조로 12년 동안 일을 했고 그 12년 동안 그는 영화감독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그를 완성시켜줄 다양한 활동에 매진했다. 아침에는 전화국에서 스페인 중산층의 소문과 스캔들 등 미래의 이야기꾼에게 있어서는 금광과도 같은 소중한 지식을 얻었고 저녁이면 글을 쓰고 연애를 했다. Los Goliardos와 함께 연극을 공연하고, 수퍼 8미리 비디오 카메라로 영화를 만들었고, 단편을 기고하고 출판하였다. 그는 ‘Almódovar and McNamara’ 라는 풍자적인 펑크 락 그룹의 멤버이기도 했다. 1980년에 일년 반 동안 16미리로 힘들게 작업한 <산정상의 페피, 루시, 봄, 그리고 다른 많은 여자들>(80)이라는 영화가 개봉하였다. 이 첫 번째 상업영화는 성공적이었으며 배우와 스탭들의 협조로 만들어진 전위 영화였던 이 영화에서 카르멘 마우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처음 영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1986년, 동생 아구스틴과 함께 그는 El Deseo S.A 라는 제작사를 설립, 첫 번째 프로젝트로 <욕망의 법칙>(86)을 제작하였다. 1988년 <신경 쇠약 직전의 여자>(87)가 토론토 영화제 관객상과 베니스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의 영화들은 전 세계에 개봉되었다. 1999년에는 그에게 다시 한번 화려한 명성을 안겨준 작품 <내 어머니의 모든 것>(99)으로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과 골든 글로브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고, 세자르, 유러피안 필름 어워드, 다비드 디 도나텔로, BAFTA, 고야 어워드를 휩쓸며 45개상 수상을 기록했다. 3년 뒤, <그녀에게>(01)로 돌아온 그에게 또다시 아카데미 각본상, 유러피안 필름 어워드에서 5관왕, BAFTA에서 2관왕, 세자르 영화제를 비롯 유수의 영화제에서 열띤 찬사와 수상의 영광이 이어졌다. 2004년에는 <나쁜 교육>이 칸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으며, 2006년에는 <귀향>으로 칸 영화제 각본상과 단체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그의 영화는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경이적인 흥행을 기록한다.

-<내가 사는 피부> 보도자료 중에서-

1999년 <내 어머니의 모든 것>으로 깐느 영화제 감독상과 타임지 선‘1999 올해의 10대 영화’ 1위로 뽑히며 세계적인 거장으로 평가받는 감독. 독특한 색채 감각과 성적인 유머,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알모도바르 스타일’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 대중성과 예술성을 적절히 혼합하여 새로운 차원의 미학을 만들어 내는 알모도바르 감독은 카를로스 사우라와 함께 스페인 영화의 커다란 기둥으로 우뚝 서있다. 2002년에는 <그녀에게>를 통해 그의 영화 세계가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는 찬사를 한몸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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