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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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07-15 출생ㅣ한국ㅣ황혼열차 (1957) 데뷔
김지미는 영화와 사랑에 대한 열정으로 지난 시대를 살아왔다.
1957년 여고생의 신분으로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1957)에 첫 출연한 이래, 지금까지 무려 80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청룡영화상과 대종상 등을 20여회나 수상했다.
또 세간에 널리 알려진 것처럼 세번의 이혼과 네번의 결혼을 거듭하며 숱한 염문을 뿌렸다.

충남 대덕에서 김한경씨의 3남 6녀의 4녀로 태어난 김지미의 본명은 김명자, 대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서울 덕성여고를 다니던 57년, 김기영 감독에게 픽업돼 <황혼열차>(1957)를 찍으면서 스크린에 데뷔했다.
이후 김기영 감독과 <초설>(1958)을, 그리고 홍성기 감독을 만나 <별아 내 가슴에>(1959)을 찍었는데, 여기서 홍성기 감독과 가까워져 60년 결혼했다.
그러나 자주 공연한 최무룡과 새로운 사랑이 싹터 62년 이혼하고, 최무룡과 재혼했다. 그러나 최무룡과의 결혼생활도 8년여만에 파경을 맞았다. 영화제작에 손을 댔던 최무룡의 사업실패가 원인이었다. 이 당시 이혼을 발표하면서 김지미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을 남겨 한동안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그후 1976년 가수 나훈아와 깜짝 결혼을 발표했다가 4년여만에 다시 헤어졌고, 다시 1991년 서울중앙병원의 이종구 박사와 결혼했다.

영화배우로서 김지미는 카리스마적 이미지를 갖는다. 이는 우선, 그녀의 타고난 외모적 조건이 많은 기여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배우로서의 진정성은 숱하게 단명하는 한국영화의 주연급 여자 배우의 정년을 넘어서, 1986년 그녀가 40대에 접어들어 자신의 이름을 딴 지미필름을 설립하고 제작자로의 변신을 통해, 스스로에게 적극적으로 성숙한 연기자로 진보할 기회를 만들어 내면서 부터이다.
즉, 김지미는 그녀의 연기 인생 후기로 갈수록 유독 강하고 독한 파국적 캐릭터를 만들어 내며 독특한 연기 세계를 구축한다. 신상옥 감독의 <이조여인 잔혹사>(1969)에서의 가부장적 궁중 질서의 금기에 도전해 사랑을 일구는 강인하고 독립적인 기질의 궁녀역, 쇠락한 가을 다시 일으키는 강인한 어머니의 <토지>(1974), 내면 연기로 다져진 무녀역으로 희생을 거부하는 여성상을 연기한 <을화>(1979), 가족과 모성애라는 숭고한 틀의 이면을 지배하는 냉정한 계급의 질서를 통해 감상적인 통일에의 환상을 폭로한 비정한 어머니를 연기한 <길소뜸>(1985), 후배 여성을 거느리고 여자 몸을 거래하는 가부장적 자본주의에 항거하는 다방 마담을 연기한 <티켓>(1986), 그리고 후기 산업사회의 서울에서 멸시를 받아가며 연하의 남자와 사랑을 완성해내는 독한 여성을 연기한 <아낌없이 주련다>(1989)는 그래서 특별하다. 이렇듯 그녀는 한국영화에서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며 시대를 풍미한 여배우였다.

그러나 그녀는 95년 영화인협회 이사장으로 선출된 이후, 98년 영화인협회 이사장 재선, 최근에 출범한 영화진흥위원회 진흥위원 파문 등 시대를 외면한 보수적 영화정책으로 영화계의 뿌리깊은 반목의 중심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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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07-15 출생한국황혼열차 (1957) 데뷔
김지미는 영화와 사랑에 대한 열정으로 지난 시대를 살아왔다.
1957년 여고생의 신분으로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1957)에 첫 출연한 이래, 지금까지 무려 80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청룡영화상과 대종상 등을 20여회나 수상했다.
또 세간에 널리 알려진 것처럼 세번의 이혼과 네번의 결혼을 거듭하며 숱한 염문을 뿌렸다.

충남 대덕에서 김한경씨의 3남 6녀의 4녀로 태어난 김지미의 본명은 김명자, 대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서울 덕성여고를 다니던 57년, 김기영 감독에게 픽업돼 <황혼열차>(1957)를 찍으면서 스크린에 데뷔했다.
이후 김기영 감독과 <초설>(1958)을, 그리고 홍성기 감독을 만나 <별아 내 가슴에>(1959)을 찍었는데, 여기서 홍성기 감독과 가까워져 60년 결혼했다.
그러나 자주 공연한 최무룡과 새로운 사랑이 싹터 62년 이혼하고, 최무룡과 재혼했다. 그러나 최무룡과의 결혼생활도 8년여만에 파경을 맞았다. 영화제작에 손을 댔던 최무룡의 사업실패가 원인이었다. 이 당시 이혼을 발표하면서 김지미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을 남겨 한동안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그후 1976년 가수 나훈아와 깜짝 결혼을 발표했다가 4년여만에 다시 헤어졌고, 다시 1991년 서울중앙병원의 이종구 박사와 결혼했다.

영화배우로서 김지미는 카리스마적 이미지를 갖는다. 이는 우선, 그녀의 타고난 외모적 조건이 많은 기여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배우로서의 진정성은 숱하게 단명하는 한국영화의 주연급 여자 배우의 정년을 넘어서, 1986년 그녀가 40대에 접어들어 자신의 이름을 딴 지미필름을 설립하고 제작자로의 변신을 통해, 스스로에게 적극적으로 성숙한 연기자로 진보할 기회를 만들어 내면서 부터이다.
즉, 김지미는 그녀의 연기 인생 후기로 갈수록 유독 강하고 독한 파국적 캐릭터를 만들어 내며 독특한 연기 세계를 구축한다. 신상옥 감독의 <이조여인 잔혹사>(1969)에서의 가부장적 궁중 질서의 금기에 도전해 사랑을 일구는 강인하고 독립적인 기질의 궁녀역, 쇠락한 가을 다시 일으키는 강인한 어머니의 <토지>(1974), 내면 연기로 다져진 무녀역으로 희생을 거부하는 여성상을 연기한 <을화>(1979), 가족과 모성애라는 숭고한 틀의 이면을 지배하는 냉정한 계급의 질서를 통해 감상적인 통일에의 환상을 폭로한 비정한 어머니를 연기한 <길소뜸>(1985), 후배 여성을 거느리고 여자 몸을 거래하는 가부장적 자본주의에 항거하는 다방 마담을 연기한 <티켓>(1986), 그리고 후기 산업사회의 서울에서 멸시를 받아가며 연하의 남자와 사랑을 완성해내는 독한 여성을 연기한 <아낌없이 주련다>(1989)는 그래서 특별하다. 이렇듯 그녀는 한국영화에서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며 시대를 풍미한 여배우였다.

그러나 그녀는 95년 영화인협회 이사장으로 선출된 이후, 98년 영화인협회 이사장 재선, 최근에 출범한 영화진흥위원회 진흥위원 파문 등 시대를 외면한 보수적 영화정책으로 영화계의 뿌리깊은 반목의 중심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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