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05-08 출생ㅣ한국ㅣ아리랑 (1953) 데뷔오래 전 허장강의 演技에 대해 한 평론가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허장강 만큼 진정한 슬픔을 연기한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다."시장통 극장의 퀴퀴한 냄새, 몸을 꿈틀거릴 적마다 삐걱삐걱 소리내던 나무 의자, 화로 위에서 갖가지 모양으로 찍혀나오던 소다빵의 달콤한 맛, 그런 것들과 함께 떠오르는 추억의 이름이다. ‘천의 얼굴’ ‘위대한 조연배우’ ‘조연의 대가’, 허장강에겐 그런 수식어들이 따라붙곤 했다. ‘마담,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할까’ ‘이번 일만 잘되면 다이아반지 사줄게’는 허장강이 남긴 명대사다.
당대의 폼나는 주연배우는 거의 신영균 최무룡 김진규 몫이었고, 김희갑이나 허장강은 늘 이들 주변에 배치된 조연들이었는데, 참 이상한 일이다. 혹시 이런 것 아니었을까. 최무룡 같은 잘생긴 주연배우들에 대한 대중의 감정이 흠모와 경외심이었다면, 김희갑이나 허장강에 대한 감정은 친밀감과 즐거움과 연민의 정이었다는 것. 영화에 관한 대화에는 늘 김희갑과 허장강이라는 이름이 끼어들곤 했다. 하기야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당대 영화 두편에 한편꼴로 출연한 셈이었다.
본명은 허장현(許長顯)이며, 서울에서 인문중학교를 졸업하고 악극단에 들어가 연예계 생활을 시작했다. 반도가극단에서 연기활동을 했으며, 1952년 육군 군예대(KAS)에 들어가서 1953년 이강천 감독의 〈아리랑〉으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그뒤 〈피아골〉(1955)에 출현하여 주목받기 시작했고 〈종각〉(1955), 〈흙>(1963),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3), 〈임꺽정〉(1961) 등에 출연하여 개성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예춘·최봉 등과 함께 악역전문 조연배우로서 이미지를 굳힌 그는 허스키한 목소리와 은근한 미소, 감은 듯한 눈 등 뛰어난 "이미지 만들기"의 연기력을 보여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상록수>(1961)로 아시아 영화제 남우조연상,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 한국일보 연극영화상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영화인친선축구대회에서 경기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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