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녀 (재개봉)> 보도자료 중에서-
1922년 10월 1일 서울교동에서 태어난다. 김기영의 집안은 당시 인테리 집안이었고 누이들이 모두 미술과 무용을 전공하여 일찍감치 예술에 눈을 뜨게 된다. 소학교 시절 서울에서 평양으로 이사를 간 김기영은 학교에서 예술적인 면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세브란스 의대에 낙방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 곳에서 영화를 보게 되고 영화에 매력을 느낀 김기영은 해방 후 돌아와 서울대 의대에 입학하게 된다. 6.25전쟁 중 부산 피난시절 선배의 권유로 대한뉴스를 만들게 되고 이는 전쟁 후 미군 공보원에서 제작하는 리버티 뉴스를 또다시 연출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1955년에 <주검의 상자>를 통해 데뷔하였고, 초기에는 <초설>(1958) <10대의 반항>(1959)같은 사실주의 영화를 주로 만들었다. 그러던 중 60년대로 들어오면서 <하녀>(1960)를 통해 그만의 독특한 색감과 화면처리, 독특한 세트 디자인 등으로 한국영화의 표현주의 영화를 개척하게 된다. 또한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 <고려장>(1963)같은 흥행영화들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데, 70년대로 넘어오면서 <충녀>(1972), <파계>(1974)를 기점으로 그만의 스타일이 더욱 발하기 시작한다.<살인나비를 쫓는 여자>(1978), <화녀>(1982), <육식동물>(1984)로 이어지나 이 외에는 범작을 내는 수준으로 그치고 만다. 이 후 칩거상태에 들어가 있다가 90년대 후반들어 김기영에 대한 평가가 활발해 지자 이에 발맞춰 차기작을 준비하던 중 1999년 집안의 갑작스런 누전 사고로 유명을 달리 했다.- <하녀 (재개봉)> 보도자료 중에서-
1922년 10월 1일 서울교동에서 태어난다. 김기영의 집안은 당시 인테리 집안이었고 누이들이 모두 미술과 무용을 전공하여 일찍감치 예술에 눈을 뜨게 된다. 소학교 시절 서울에서 평양으로 이사를 간 김기영은 학교에서 예술적인 면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세브란스 의대에 낙방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 곳에서 영화를 보게 되고 영화에 매력을 느낀 김기영은 해방 후 돌아와 서울대 의대에 입학하게 된다. 6.25전쟁 중 부산 피난시절 선배의 권유로 대한뉴스를 만들게 되고 이는 전쟁 후 미군 공보원에서 제작하는 리버티 뉴스를 또다시 연출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1955년에 <주검의 상자>를 통해 데뷔하였고, 초기에는 <초설>(1958) <10대의 반항>(1959)같은 사실주의 영화를 주로 만들었다. 그러던 중 60년대로 들어오면서 <하녀>(1960)를 통해 그만의 독특한 색감과 화면처리, 독특한 세트 디자인 등으로 한국영화의 표현주의 영화를 개척하게 된다. 또한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 <고려장>(1963)같은 흥행영화들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데, 70년대로 넘어오면서 <충녀>(1972), <파계>(1974)를 기점으로 그만의 스타일이 더욱 발하기 시작한다.<살인나비를 쫓는 여자>(1978), <화녀>(1982), <육식동물>(1984)로 이어지나 이 외에는 범작을 내는 수준으로 그치고 만다. 이 후 칩거상태에 들어가 있다가 90년대 후반들어 김기영에 대한 평가가 활발해 지자 이에 발맞춰 차기작을 준비하던 중 1999년 집안의 갑작스런 누전 사고로 유명을 달리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