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영

 

419,425관객 동원
 1919-10-01 출생ㅣ한국 서울ㅣ주검의 상자 (1955) 데뷔
김기영 감독은 1955년 <주검의 상자>로 영화감독 데뷔를 한 이래 총 32편의 장편영화를 연출하며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된다. <하녀>를 비롯, 이후 그가 내놓은 <화녀>, <화녀82>는 일명 ‘하녀 3부작’으로 불리며 영화 팬들 사이에 주목을 받았고, <충녀>, <육체의 약속>, <육식동물> 등 그가 내놓은 대부분의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과감한 시도와 독창적인 실험정신으로 널리 회자되고 있다. 뛰어난 영화작가로서도 그러하지만 김기영 감독은 <화녀>(234,110명), <충녀>(155,352명) 등이 연이어 한 해 최다 관객을 동원, 흥행감독으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1980년대 이후로 하강세에 접어든 그의 커리어는 90년대에 접어들며 소강상태를 보였지만 1997년부터 그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하는 행사가 열리기 시작했고,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린 회고전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전무에 가까웠던 그에 대한 세계영화계의 평가는 일본, 미국, 독일, 프랑스 등으로 빠르게 번져나가 ‘김기영의 재발견’으로 평가되기에 이르렀고, 1998년 베를린 영화제에서는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제가 시작되기 전인 2월 6일, 불의의 사고로 부인과 함께 사망하면서 유작이 될 수 있었던 <악녀>의 제작은 물거품이 됐고, 그의 불운한 죽음과 작품세계는 시간이 갈수록 신화가 되어가고 있다.

- <하녀 (재개봉)> 보도자료 중에서-

1922년 10월 1일 서울교동에서 태어난다. 김기영의 집안은 당시 인테리 집안이었고 누이들이 모두 미술과 무용을 전공하여 일찍감치 예술에 눈을 뜨게 된다. 소학교 시절 서울에서 평양으로 이사를 간 김기영은 학교에서 예술적인 면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세브란스 의대에 낙방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 곳에서 영화를 보게 되고 영화에 매력을 느낀 김기영은 해방 후 돌아와 서울대 의대에 입학하게 된다. 6.25전쟁 중 부산 피난시절 선배의 권유로 대한뉴스를 만들게 되고 이는 전쟁 후 미군 공보원에서 제작하는 리버티 뉴스를 또다시 연출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1955년에 <주검의 상자>를 통해 데뷔하였고, 초기에는 <초설>(1958) <10대의 반항>(1959)같은 사실주의 영화를 주로 만들었다. 그러던 중 60년대로 들어오면서 <하녀>(1960)를 통해 그만의 독특한 색감과 화면처리, 독특한 세트 디자인 등으로 한국영화의 표현주의 영화를 개척하게 된다. 또한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 <고려장>(1963)같은 흥행영화들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데, 70년대로 넘어오면서 <충녀>(1972), <파계>(1974)를 기점으로 그만의 스타일이 더욱 발하기 시작한다.<살인나비를 쫓는 여자>(1978), <화녀>(1982), <육식동물>(1984)로 이어지나 이 외에는 범작을 내는 수준으로 그치고 만다. 이 후 칩거상태에 들어가 있다가 90년대 후반들어 김기영에 대한 평가가 활발해 지자 이에 발맞춰 차기작을 준비하던 중 1999년 집안의 갑작스런 누전 사고로 유명을 달리 했다.
그에게는 너무나 시대를 앞 선 나간 불운의 감독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여생 마지막에 영화후배들로부터 높은 인정을 받아 동료들이 부러워하는 평가를 받아낸 행운아이기도 하다.
더보기
1919-10-01 출생한국 서울주검의 상자 (1955) 데뷔
김기영 감독은 1955년 <주검의 상자>로 영화감독 데뷔를 한 이래 총 32편의 장편영화를 연출하며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된다. <하녀>를 비롯, 이후 그가 내놓은 <화녀>, <화녀82>는 일명 ‘하녀 3부작’으로 불리며 영화 팬들 사이에 주목을 받았고, <충녀>, <육체의 약속>, <육식동물> 등 그가 내놓은 대부분의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과감한 시도와 독창적인 실험정신으로 널리 회자되고 있다. 뛰어난 영화작가로서도 그러하지만 김기영 감독은 <화녀>(234,110명), <충녀>(155,352명) 등이 연이어 한 해 최다 관객을 동원, 흥행감독으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1980년대 이후로 하강세에 접어든 그의 커리어는 90년대에 접어들며 소강상태를 보였지만 1997년부터 그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하는 행사가 열리기 시작했고,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린 회고전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전무에 가까웠던 그에 대한 세계영화계의 평가는 일본, 미국, 독일, 프랑스 등으로 빠르게 번져나가 ‘김기영의 재발견’으로 평가되기에 이르렀고, 1998년 베를린 영화제에서는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제가 시작되기 전인 2월 6일, 불의의 사고로 부인과 함께 사망하면서 유작이 될 수 있었던 <악녀>의 제작은 물거품이 됐고, 그의 불운한 죽음과 작품세계는 시간이 갈수록 신화가 되어가고 있다.

- <하녀 (재개봉)> 보도자료 중에서-

1922년 10월 1일 서울교동에서 태어난다. 김기영의 집안은 당시 인테리 집안이었고 누이들이 모두 미술과 무용을 전공하여 일찍감치 예술에 눈을 뜨게 된다. 소학교 시절 서울에서 평양으로 이사를 간 김기영은 학교에서 예술적인 면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세브란스 의대에 낙방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 곳에서 영화를 보게 되고 영화에 매력을 느낀 김기영은 해방 후 돌아와 서울대 의대에 입학하게 된다. 6.25전쟁 중 부산 피난시절 선배의 권유로 대한뉴스를 만들게 되고 이는 전쟁 후 미군 공보원에서 제작하는 리버티 뉴스를 또다시 연출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1955년에 <주검의 상자>를 통해 데뷔하였고, 초기에는 <초설>(1958) <10대의 반항>(1959)같은 사실주의 영화를 주로 만들었다. 그러던 중 60년대로 들어오면서 <하녀>(1960)를 통해 그만의 독특한 색감과 화면처리, 독특한 세트 디자인 등으로 한국영화의 표현주의 영화를 개척하게 된다. 또한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 <고려장>(1963)같은 흥행영화들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데, 70년대로 넘어오면서 <충녀>(1972), <파계>(1974)를 기점으로 그만의 스타일이 더욱 발하기 시작한다.<살인나비를 쫓는 여자>(1978), <화녀>(1982), <육식동물>(1984)로 이어지나 이 외에는 범작을 내는 수준으로 그치고 만다. 이 후 칩거상태에 들어가 있다가 90년대 후반들어 김기영에 대한 평가가 활발해 지자 이에 발맞춰 차기작을 준비하던 중 1999년 집안의 갑작스런 누전 사고로 유명을 달리 했다.
그에게는 너무나 시대를 앞 선 나간 불운의 감독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여생 마지막에 영화후배들로부터 높은 인정을 받아 동료들이 부러워하는 평가를 받아낸 행운아이기도 하다.
더보기
1985
1982
1981
1979
1972
1960
사업자등록번호 211-88-91225 l 통신판매업 신고번호 제2016-서울강남-02630호 l 대표이사 정이은
㈜맥스무비 l 06099 서울시 강남구 선릉로 125길 8, 301호(논현동, 유진빌딩)
인터넷신문등록번호 서울 아 02730 | 등록일자 2013년 7월 11일 | 제호 맥스무비 닷컴 | 발행인 : 정이은ㅣ편집인 : 이은지

Copyright ⓒ Asiatribune Corporatio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