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07-01 출생 1902년 7월 1일 프랑스 물루즈에서 태어난 윌리엄 와일러는 1981년 7월 27일 미국 캘리포니아 비벌리힐즈에서 사망했다.
스위스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윌리엄 와일러는 파리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했다. 1922년 어머니의 먼 사촌인 칼 라밀을 만난 20살의 와일러는 미국으로 건너가 사촌이 일하고 있는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 함께 일하게 된다. 해외 상영부에서 선전용 문구를 제작하던 와일러는 곧 조감독으로 일하게 되고 두 릴 분량의 서부극 감독일도 맡게 되었다.
몇 편의 서부극을 만들던 와일러는 < Has Anybody Here Seen Kelly?>(1927)라는 작품을 찍으면서 더 이상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요구하는 날림식의 제작을 거부하고 매우 공들이면서 영화를 찍게 된다. 와일러는 곧 아주 까다로운 사람으로 알려졌고 실제로 그는 아주 단순한 씬이라고 할지라도 매우 힘들여 촬영을 했었고 많은 사람들이 와일러의 이러한 작업방식에 불만을 가졌다. 그러나 프로듀서 사무엘 골드윈은 와일러의 작업방식을 좋아했고 두 사람은 오랫 동안 함께 작업한다. 와일러는 주로 유명한 연극과 소설을 각색하여 만들었는데 서머셋 모음의 <폭풍의 언덕>(1939), <편지>(1940), 릴리암 헬먼의 <작은 여우들>(1941))등은 대표적 작품들이다.
와일러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베티 데이비스는 와일러의 영화에서 매우 성숙한 연기를 보여주는데 그녀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지저벨: Jezebel>(1938)외에도 < The Letter>(1940), < The Little Foxes>(1941)등에서 함께 작업했다.
배우, 공간, 카메라에 이해가 뛰어났던 그는 <나뉘어진 집>(1931)에서 치밀한 계산하에 역동적인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촬영 감독 그랜트 톨랜드와 함께 작업했던 와일러는 깊이감있는 화면들을 만들어내었고 수직적 움직임도 곧잘 활용하였다.
2차 대전시 공군으로 참전한 와일러는 두 편의 다큐멘터리 < The Memphis Belle>(1943), < Thunderbolt>(1944)를 만들어 훈장을 수여받기도 한다. 전쟁 후 와일러와 톨랜드는 <우리 생애 최고의 해>(1946)에서 전쟁 후유증으로 사회에 적응하기 힘든 퇴역군인들의 삶을 심도있게 접근한다.
당시로서 최고의 제작비를 들여 만든 대서사극 <벤허>(1959)는 아카데미 작품, 감독(윌리암 와일러), 남우주연(찰튼 헤스튼), 남우조연(휴 그리피스), 촬영(로버트 L 서티스), 미술(윌리암 호닝 외 2명), 녹음(MGM 녹음 스튜디오), 음악(미클로스 로자), 특수효과(아놀드 길레스피 외 2명), 의상디자인(엘리자베스 하펜든), 편집(랄프 윈터스 외 1명)상 등 모두 11개 부문 수상을 수상하면서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흥행성적을 기록한다.
평생 < Mrs. Miniver>(1942), < The Best Years of Our Lives>(1946), < Ben-Hur> (1959) 등으로 세 번의 아카데미 상을 수상한 와일러는 그외에도 <로마의 휴일>(1953), <화니 걸>(1968)등의 따스한 로맨스물도 만들었다. < The Liberation of L.B. Jones>(1970)을 마지막 작품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작업을 중단하고 만다.
앙드레 바쟁은 "와일러의 심도 깊은 화면들은 관객들에게 스스로 관찰하고 선택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형성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라고 말했으며 "민주적이고 중립적인 시선을 가진 감독"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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