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무비= 맥스무비취재팀 기자] JTBC의 16부작 드라마 <밀회>는 첫 방송부터 남달랐다. 부와 사회적 지위을 가진 40대 여성과 가난하고 재능 있는 20대 남성의 불륜, 이라는 소재는 사실 이 드라마가 선보인 파격의 일부일 뿐이다. <밀회>는 멜로 드라마가 추구해야 할 본질을 건드렸다. 한 사회에서 사랑이라는 감정 즉, ‘멜로’가 발현되는 지반에 무엇이 있는가. ‘사랑’이라는 지극히 비현실적 감정이 치졸하고 기막히고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어떻게 피어나는가. 시청자들은 <밀회>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을 즉각 이해했고, 열광했다. 낯이 붉어지는 구차한 현실을 위로하듯 어루만지는 음악에 함께 위로 받으며 혜원과 선재의 ‘밀회’를 지켜보았다. ‘가짜 멜로’와 절대 타협하지 않는 이 고집스러운 멜로 드라마의 지휘자, 안판석 PD를 <맥스무비> 단독 인터뷰했다. 다소 긴 인터뷰를 3회에 나눠 게재한다. 오래도록 곱씹으며 읽어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 <맥스무비> 편집자 주
손사래를 쳤다. 16부의 이야기를 이미 내놓았는데 더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는 것. 하지만 선재가 바흐의 평균율을 굳이 끊어 친 이유에 대해 집요하게 캐물었던 혜원의 심정마냥, 대본과 화면 사이에 존재했을 연출가의 해석에 대해 질문하고 싶은 것은 차고 넘쳤다. 어렵사리 말문을 연 그는 연출가로서 모든 스태프와 배우들이 충분히 자고, 충분히 쉬며 촬영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이 <밀회>의 그 어떤 성취보다 자랑스럽다고 했다.
<밀회>의 기획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연혁이 길다. 2007~8년 무렵 ‘퓨처원’이라는 제작사에서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도쿄타워> 판권을 사서 내가 계약돼 있던 제작사 ‘드라마하우스’와 공동으로 만들자는 제안을 했다. 정성주 작가도 그때부터 참여했었는데 나는 당시 드라마 각색이 불가능하다 싶었다. 좋은 소설인데 스토리가 없었으니까. 감상 위주로 써내려 간 소설이라 내용이 너무 적었고. 헌데 하필 캐스팅 문제로 기획이 어그러지면서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퓨처원 측에서는 계속 미련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작가들과 각색작업을 하다 잘 안되자 다시 정성주 선생을 찾아간 모양이었다. 선생이 보니 제대로 하려면 이걸 새로 써야겠다 싶었던 거다. 과거의 버전들은 모두 사라지고 정 선생이 백지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다. 내 생각에 정 선생은 그런 형태의 멜로를 통해 뭔가 하고 싶은 말씀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작년 6월에 힘들여 쓴 세 권 정도의 대본을 가지고 나더러 만나자고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만들어볼 만한 가치가 있겠더라. 이른 바 ‘화보 부부’의 허상에 관해 이야기하셨는데 이미 그때 <밀회>의 주제라면 주제가 정선생님의 머릿 속에 단단하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김희애 씨는 이미 <아내의 자격>에서 검증한 배우라면, 유아인 씨는 어떻게 캐스팅하게 된 건가? 김희애 씨의 추천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정성주 선생이 같이 하자고 처음 제안했을 때 김희애 씨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초창기부터 이미 한 배를 탄 셈이다. 이후로는 남자 주인공을 누구로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가장 먼저 추천 받은 게 유아인이었다.
문제는 남자주인공이 피아노를 쳐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피아노 연주하는 모습이 엉터리로 나오면 민망해서 어떻게 보나? 언제나 작품의 성공과 실패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건 민망하지 않은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다. ‘피아노를 천재적으로 쳐야 하는데 이걸 어떡하나.’ 그 공포가 말도 못했다. 심지어 중학교 정도까지는 피아노 쳐본 배우를 대상으로 오디션도 했다.
하지만 이후에 깨우친 사실은 피아노란 이런 식으로 해서 되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예컨대 입시를 위해 고등학교 3학년까지 피아노를 쳤다 한들 그 소리와 동작을 방송에 쓸 수 없다. 5초도 쓸 수 없다. 심지어 한 음만 쳐봐도 전문가들은 잘 치는지 못 치는지 안다. <밀회>의 피아니스트 슈퍼바이저를 맡은 김소형 씨, 박종훈 씨 같은 분들은 몇 초만 듣고도 간파하고 민망해서 견디질 못한다. “저렇게 치는 게 방송에 나가면 안돼요.” 목숨 걸고 막는다.
예를 들면 대본에 ‘피아노를 치다가 살짝 실수한다.’는 지문이 있다고 치자. 방송에서 시청자들이 실수라는 걸 느끼려면 티가 나야 하지 않나. 하지만 시청자들이 느낄 정도로 티가 난다면 그건 실수 정도가 아니고 피아니스트로서 끝장이라는 거다. 그러면 살짝 실수하는 건 대체 어느 정도인가? 연주로 시범을 보여주는데 아무도 실수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결국 피아니스트 슈퍼바이저들의 진심이 나를 감동시켰다. 그래서 <밀회>의 연주장면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나라 최고 전문가들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에 맞추었다.
심지어 대본과 연출에서도 예전과 다르게 비타협적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일반적인 드라마에서는 눈앞에 펼쳐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그들이 나누는 전문적인 대화가 어떤 내용인지 극본에서 최대한 상세하게 풀어주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밀회>에서는 회사 경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거나 입시 비리를 조작하는 장면들에서 거두절미하고 그저 그들이 쓸 법한 어휘들만이 오갈 뿐이다.
사실은 나도 점점 변해왔다. 물론 친절하게 시청자들이 다 알아듣게 해주면 좋지. 그러면 어느 부분에서는 열효율이 떨어지는 수가 있다. <하얀 거탑>때부터 느끼기 시작한 건데 ‘인물들이 갈등하는 과정에서 의학용어가 난무하는데 자막을 넣어줘야 하나? 설명을 해줘야 하나?’ 결국 자막은 넣지 않고 타협을 했었다. 요즘의 생각은 시청자들이 모르는 건 몰라도 된다는 쪽이다. 대신 모르고 봐도 전개는 따라갈 수 있어야겠지.어떤 사람은 다 이해해서 더 재미있을 수도 있을 거고. 만약 운이 좋아서 이 드라마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는 새롭게 이해하는 부분이 생긴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야기를 되돌려서, 결국 주연배우는 전문 연주자가 아닌 배우로 결론을 내린 셈이다. 그렇다면 화면과 소리를 통해 그들의 연주를 전문가도 인정할 수준의 것으로 가공하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듯하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연주 장면은 피아노를 짚은 손가락 하나하나, 현을 긋는 활 하나하나 어긋나는 것이 없다. 백퍼센트 싱크율이다. 과연 지금까지 이런 작품이 있었을까 조사해보고 싶을 정도로 어긋난 게 없다.
먼저 모든 음원은 해당 장면이 촬영될 바로 그 공간에서 그 악기로 녹음했다. 비결을 이야기하자면, 예를 들어서 마지막에 선재와 학생들이 연주하는 드보르작의 현악 5중주라고 하자. 그 곡이 굉장히 길다. 그 곡 전체를 다 듣고 제대로 외워서 연주하는 걸 찍으려면 1년도 모자란다. 하지만 보통의 작품들에서 그런 장면을 찍을 때는 일단 전체를 다 찍는다. 그러려면 당연히 틀리는 부분도 나올 수밖에 없다. <밀회>에서 싱크를 다 맞출 수 있었던 이유는, 연주한 분량과 방송 나간 분량이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만약 방송에 나갈 연주가 18초라고 하면 딱 18초만 연습한다. 방송에 나갈 분량을 미리 예견해서 그만큼만 죽어라 연습해서 맞춘 것이다. 출연했던 인천시향 오케스트라도 필요한 부분만 악보로 뽑아서 그것만 연주했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연주를 해야 될 부분이 그렇게 많지 않다. 앵글을 바꿔서 찍는다고 해도 역시 18초만 찍으면 되는 셈이니까.
대역 연주자들이 치는 첫 번째 연주에서는 방송에 쓸 음원을 녹음한다. 그리고 두 번째 연주부터는 연기자가 싱크를 맞춘다. 두 번째 연주할 때는 자기가 연주하는 소리도 같이 울리니까 옆에서 슈퍼바이저가 박자를 맞춰준다. 그러니 정확하게 다 맞을 수밖에 없다.
2회 방영분을 보면 선재는 혜원의 집에서 수많은 곡을 치는데, 그것도 정확히 편집된 부분만큼만 연습해서 쳤단 말인가. 곡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몇 초. 정확하게 계획해서 지정한 거다.
그렇다면 오히려 곡의 어떤 부분을 얼마만큼 쓸 것인가를 계산하는 초기 단계가 더 힘들었을 것 같다. 너무 힘들었다. 어떤 곡을 선택해야 하고 그 중 어디를 선택해야 하나. 심지어 우리는 무언가를 판단할 때 2~30초 정도로 대충 생각하지, 22초라는 식으로 딱 떨어지게 판단하지 않으니까. 그런 정확한 판단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면 공포가 밀려온다. 틀리면 어떡하지? 할 수 없다. 그럼에도 판단을 내려야 한다.연기자가 아닌 피아니스트 박종훈에게 조인서라는 비중 있는 배역을 맡긴 것도 의외였다. 심지어 극중에서 피아노를 치는 일이 많은 것도 아니었는데. 어쩌면 그의 아마추어적인 연기가 그를 둘러싼 인물들과의 대비 효과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나. 연주하는 흉내만 내는 사람을 최소화하고 싶었다. 그래서 주인공 두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실제 연주자를 캐스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박종훈 씨는 면접을 보니 사람이 안정되어 있고 침착했다. 그런 사람들은 연기도 잘 한다. 혹자는 박종훈 씨의 연기가 어색하지만 따뜻하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나의 평가는 연기를 참 잘했다는 것이다. 그의 연기를 어색하다고 느끼는 건 우리가 알게 모르게 텔레비전 드라마 연기를 보며 가지게 된 편견일 수도 있다. 우리가 잘 한다고 여기는 연기가 어쩌면 가짜 연기일 수 있다는 뜻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내 기준에서는 박종훈 씨, 양민영 씨(김인주 교수 역) 모두 잘 했다. 말한 것처럼 다른 인물들과의 불균질성을 의도한 건 물론 아니다.
피아니스트 손열음 씨가 <밀회>에 대해 쓴 글은 보았나? 손열음 칼럼을 예전부터 너무 좋아했다. 나 뿐만 아니라 정성주 선생도 좋아해서 빼놓지 않고 보았다. 광팬이다. <밀회>에 대해 쓴 글도 좋게 봤다.
어쩌면 억울할 수도 있었을 텐데. 사실 손열음 씨의 말대로 선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재’는 아니지 않은가. 선재는 스스로를 엄격하게 훈육해서 그 단계에 이른 사람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바를 정자 그려가면서 무지막지하게 연습한 인물이니까. 하지만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천재들을 전형적으로 다뤄온 타성이 있고, 그 드라마의 세계에 내가 있으니까 나도 책임이 있는 거다.
천재들을 다뤄온 타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실력은 논외로 하더라도 선재의 언행에서 천재성의 묘사가 납득되는 부분이 있다. 천재에 관한 정의 중 ‘주저 없이 본질로 접근하는 재능’이라는 표현이 무척 합당하다고 생각하는데, 선재는 말을 할 때도 에두르는 법이 없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또라이’ 소리를 들을지언정.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게 결국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자기 머리로 생각을 하고 자기 입으로 자기 말을 한다는 거다. 그게 천재다. 거기에 상투성이 개입되면 천재가 아니다. 온전한 자기 자신이 천재가 될 수 있는 거다. 설혹 틀릴지 몰라도 지금은 자신을 믿는다는 것. 똑같은 사람 만 명 중 하나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유일해야지. 인간이 유일하려면 줄넘기를 한 번에 백만 번 씩 할 필요도 없고 그저 자기 자신이기만 하면 된다. 자기 자신으로서 진실되기만 하면 유일무이한 거다. 그게 천재다.선재 특유의 쭈뼛거리는 몸동작, 머뭇거리는 말투는 유아인 씨의 아이디어인가? 그렇다. 타고난 배우다. 내가 본 유아인의 특성을 이야기하자면 머리가 비상하고 정직하다는 것. 조금이라도 가짜인 것의 이물감을 견디질 못한다. 느낌으로만 연기를 하는 게 아니고 감성을 지적으로 통제해가면서 연기한다. 그 나이에.
선재의 발 페티시즘은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이태준의 작법서 <문장강화>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가장 쓰기 힘든 편지가 구체성이 없는 편지, 즉 위문편지라고. 아무리 대문호라도 국군장병 위문편지 쓰라고 하면 힘들 거다. 하지만 아버지한테 돈 부쳐달라고 쓰는 편지는 누구나 명문을 쓴다. 이렇게 구체성이 들어가면 누구나 좋은 글을 쓸 수 있는데, <문장강화>에 보면 그 다음 단계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버지가 돈을 부쳐줘서 남은 돈을 돌려보내며 편지를 쓰는 내용이다. “보내주신 돈 잘 썼고 남은 돈을 동봉합니다.” 이렇게 쓸 수도 있지만 “보내주신 돈 잘 썼고 남은 돈 3,250원을 동봉합니다.”라고 쓰면 실물감이 들면서 리얼리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거다.
발 페티시즘도 마찬가지다. 저 여자는 정말 예쁘다, 정말 예쁘다라고 백날 말해봤자 상투적이고 실물감이 없다. 하지만 발을 언급함으로서 실물감이 확 생긴다. 문학적 기술이다.
글 조민준(전 <드라마틱> 편집장), 유선주(드라마 칼럼니스트) 사진제공 JTBC
▶ <밀회>의 모든 것을 담은 <맥스무비> ‘단독 인터뷰 | <밀회> 안판석 PD’ ②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