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인터뷰 ②| <밀회> 안판석 PD “최고의 리얼리티가 최고의 판타지를 만든다.”

2014-05-20 16:16 맥스무비취재팀 기자

[맥스무비= 맥스무비취재팀 기자]

전작인 <아줌마>, <하얀거탑>, <아내의 자격>과 비교하면 그 어느 때보다 오혜원은 회색의 세계에 있는 주인공이다. 그에 반해 주변 인물들은 자신들이 속한 세계의 다채로운 전형들을 연기하고 있는데. 문학적으로 이야기하면 드라마의 주인공은 결국 한 명이다. 하나의 인생을 다루는 거다. 그리고 하나의 인생이 구제된다면 전 세계가 구제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도 나오는 이야기인데, 사람의 인생을 다루는 게 드라마라고 해도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를 다 그릴 수는 없다. 인물의 일대기가 압축되어 들어갈 법한 어느 시기의 사건을 다뤄야 한다. 그렇게 인물을 만들어놓으면 그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생각을 끄집어내야 한다. 어떤 인물을 둬야 오혜원의 내면이 하나씩 빠져 나올까? 주변 인물들은 그렇게 배치시킨 것이다. 오혜원의 내면이 가장 효율적으로 나올 수 있게. 주인공의 내면이 단순하면 조연 배치도 쉬운데, 회색이라면 좀 더 교묘한 인물들을 배치해야 한다.

주변 인물들의 세계가 전형적이라고 해도 관습적이지는 않다. 이를테면 대개의 드라마에서 부패한 재벌가에 비해 서민들의 삶은 건강하다는 식의 대비를 굳이 강조하곤 하는데, 선재가 다녔던 고등학교 교무실의 풍경이나, 공익근무요원으로 일했던 동사무소 사람들을 보면 그들도 마찬가지의 편견에 둘러싸여 있다. 애초에 이 작품을 할 수 없다고 한 이유는, 마흔 살 먹은 여자와 스무 살 먹은 남자가 진실된 사랑을 한다는 게 판타지스럽기 때문이었다. 이걸 납득시킬 자신이 없었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정말 주변에서 흔히 보던 사람들처럼 인물들이 리얼해야 하고 그런 작은 리얼리티에 빠져서 마치 실제 세계에 있는 듯한 느낌을 시청자들이 받게 해야 그 판타지스러운 사랑도 납득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토리 전개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리얼리티지만 시간을 들여서 보여줘야 할 장면들이 있다. 그런 장면들이 힘을 발휘하면서 그들의 사랑이 납득된 거다. 가장 어려운 일인데, 1~2회에서 그게 가능해지면서 다음부터는 수월해졌다.

구체적으로 어떤 장면들일까? 혜원과 선재가 처음 만났을 때.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장면이다. 그 장면이 가장 중요하다고 봤다. 스무 살 먹은 남자가 마흔 살 먹은 여자를 힐끗힐끗 쳐다보는 게 자연스럽도록 연출하는 것.

그 장면에서 선재가 반하는 것은 단순히 혜원의 여성적인 매력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가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줬다는 인정욕구의 충족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가지게 된 것도 같다. 그렇다. 그 대목을 두고 정성주 선생과 이야기하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과거 시인이었던 영화감독 유하가 내 대학시절 친구다. 어느 날 수업시간에 나란히 앉아 있는데, 듣기 싫은 수업이다 보니 걔는 연습장에 그림을 그리고 있더라. 나도 수업을 듣지 않던 중이라 그림 그리는 걸 보게 되었는데 옆에 글자들이 적혀 있었다. 자세히 보니 시였다. 아주 잘 썼더라.나는 고등학교 때 문학소년이어서 문학비평 어휘도 많이 알았다. 고작 스물 세 살짜리가 전문용어를 쓰며 진지하게 말하는 건 부끄러운 일인데도, 그 시를 보고 유하에게 진지하게 얘길 해버렸다. 이러이러한 이유로 참 잘 쓴 시라고. 그러자 얼굴이 빨개지더니 중학교 때부터 시를 써왔다고 고백하면서 자기가 쓴 다른 시들을 보여줬다. 참 오묘한 순간이다. 우연히 시를 보고 내가 진지하게 평가를 해 준 순간 그의 내면에서 뭔가가 확 열려버린 거다. 그리고 그게 걔의 운명을 바꿨다.

초반부에 선재가 혜원의 집에서 피아노를 친 후 벅찬 심정으로 골목을 내려가는 장면이 있다. 피아노를 치는 장면보다 그 장면을 먼저 찍어야 했다. 걱정이 됐다. 유아인은 아직 어린 배우인데, 과연 이 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불현듯 얘기를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100미터 가량의 언덕길을 뛰어 올라갔다. 조명도 켜져 있고 카메라도 대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아인에게 유하와의 이야기를 들려줬더니 단박에 알아들었다. 어쩌면 본인도 이미 그렇게 해석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신을 연기하는데 정말 기가 막혔다. 그때 이 사랑은 납득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선재 자신도 몰랐던 재능을 혜원이 일깨워줬다기보다는 어느 수준인지만 모를 뿐 그도 스스로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지 않았을까. 아이디도 ‘나천재’였는데. 맞는 말이다. 배웠건 혼자 터득했건 어느 단계에 이르면 저절로 알게 된다. 자기가 잘 치는지 못 치는지. 다만 말을 못 했던 거다. 나는 그 말을 하고 싶고 또 듣고 싶은데 자신의 처지,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의 행동반경에서는 꺼내거나 들을 수가 없었던 얘기다. 오혜원이 단추를 눌러준 셈이다. 그 순간 봇물 터지듯 뭔가가 확 열려버린 거고. 사랑의 배경이 바로 그거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아내의 자격>과 비교하면 사랑의 방식이나 작동기제가 복잡해진 측면도 있다. <아내의 자격>때는 단순했다. 비슷한 또래의 남녀가 사랑에 빠진다 한들 누구나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밀회>의 사랑은 복잡해서 더 정교한 해석과 장치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루어진 후에는 폭발력이 더 셌다. 그래서 열광했던 거겠지.

두 사람 사이의 디테일뿐만 아니라, 분식집의 풍경, 교무실에서 교사들이 나누는 무심한 대화의 일상적인 느낌들이 차곡차곡 쌓여 두 남녀가 함께 피아노 치던 장면의 판타지를 극대화했다는 생각이다. 맞다. 그런 토대가 있었으니까 납득이 되는 거다. 정성주 선생은 짧은 대사 속에서 리얼리티를 얻어내는 재주가 비상한 작가다. 교무실 장면의 대화? 몇 마디 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두어 마디 듣기만 해도 그냥 실재감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선곡 이야기를 해 보자. 초반에 해원과 선재가 함께 연주한 슈베르트의 연탄곡이라든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 등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곡들이다. 그리고 후반부에 쓰인 드보르작의 현악 5중주, 모차르트의 론도에 대해서는 대사를 통해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극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쓰인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에 대해서는 별다른 주석이 없었다. 정성주 선생이 클래식 마니아라 1차적으로는 직접 선곡한 음악을 대본에 썼다. 그리고 그 곡들에는 해당 장면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역사성이나 에피소드들이 담겨 있다. 직접 고르기 애매할 때는 슈퍼바이저 김소형 씨와 통화하면서 함께 고르기도 했고.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연주자라고 해도 세상의 모든 곡을 잘 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곡은 잘 쳐도 어떤 곡은 안 맞을 수도 있는데다, 한 연주자가 베토벤, 라흐마니노프, 리스트 모두를 레퍼토리로 할 순 없다. 유아인에게도 송영민 씨라는 대역 피아니스트가 있었는데, 잘 치는 곡에 따라 대역 피아니스트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문가들은 들으면 아니까. 치는 사람이 바뀌었구나. 이선재의 연주가 아니잖아. 그건 또 견딜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송영민 씨가 소화할 수 있는 레퍼토리를 선정해야 했고 그게 라흐마니노프였다. 러시아에서 공부한 피아니스트였으니까.

그 원칙을 어긴 장면은 딱 두 부분 있다. 첫 번째는 엔딩에 나왔던 모차르트의 론도다. 모든 사건을 관통하면서 선재도 성숙해야 한다. 따라서 연주에서도 성숙한 소리가 나와야 하는데 송영민 씨도 잘 쳤지만 성숙했다고 할 만큼 달라진 소리는 내지 못했다. 당연하다. 송영민 씨가 그 사이 성숙한 건 아니니까.

또 한 가지 이유는 모차르트의 곡이 단순해 보이지만 사실 어릴 때부터 기교에 대한 하드 트레이닝을 받은 사람만이 연주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저 느낌으로 치거나 다른 스타일로 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다. 송영민 씨가 받은 음악 교육과는 또 달랐던 거다. 그래서 모차르트의 론도는 김소형 선생이, <반짝반짝 작은별>(‘아, 어머니 들어주세요’ 주제에 의한 12개의 변주곡)은 박종훈 선생이 쳤다.

김소형 씨의 인터뷰에 따르면 <반짝반짝 작은별>은 연출가가 직접 선곡했다고.대단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혜원 앞에서 선재가 이 곡 저 곡을 들려주는데, 전부 다 클래식 매니아들만 알 만한 음악이라면 좀 그렇겠다는 생각을 했다. 연주를 잘 하면서도 길거리든 어디든 들어봤을 법한 곡이 하나 들어가면 좋겠다 싶었다. 어쨌든 연주 장면 때문에 이전의 드라마들에 비해 작업시간은 몇 배가 들었을 것 같다. 그렇지만은 않다. 보통 미니시리즈는 무박 60일, 80일씩 찍지 않나. 그것도 연출 B팀, C팀까지 돌리면서. 나는 그게 맘에 들지 않는다. 작품이기 때문에 한 사람의 시선이 중요하고, 일관성이 중요하다. 한 명의 연출가가 하나의 작품을 완주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고 과정이 결과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또한 모든 예술은 휴머니즘을 위해 존재하는 건데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인권이나 일상의 행복이 무시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작품의 질, 성공과 실패 이런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거라고 본다. 철저하게 쉴 시간을 주고, 잘 시간을 주고, 씻을 시간을 주고, 노닥거릴 시간을 주고. 그걸 지키는 게 첫 번째 목표다. 내가 잘 한 것은 그걸 지켰다는 거다. 그걸 자랑하고 싶다. 너무 잠을 잘 자고, 너무 맛있게 먹고, 너무 즐겁게 노닥거리면서 끝까지 해냈다는 게 가장 마음에 든다.

가능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물리적으로 공이 많이 들 수밖에 없어 보이는 작품인데. 아까 말했던 것들이다. 음악을 얼마만큼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왔을 때, 확실하게 결정을 내리는 것. 2~30초라는 식이 아니고 22초. 틀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한번 실수하면 그 감각이 몸에 새겨진다. 만약 이 장면에서 엑스트라가 몇 명 필요한가? 2~30명이 아니고 22명. 이렇게 정했는데 결과적으로 부족하거나 넘치면 그게 구체적으로 몸에 각인된다. ‘이건 25명이 맞구나’라는 식으로. 그렇게 음악의 분량, 필요한 사람, 필요한 장소 등등 구체적으로 판단하고 결과를 보면서 훈련을 쌓아 왔으니까 몸에 새겨진 게 많은 거다. 이젠 틀릴 일도 별로 없고, 시간 걸릴 일도 없고, 일이 너무 빠른 거다.

그렇듯 정교한 예측치 또한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 것일 텐데. 27년을 했다. 조연출 첫날부터 쌓인 게 여기까지 온 거다. 만약 처음부터 “엑스트라는 2~30명 정도?” 이런 식으로 대충대충 판단해 왔다면 10년, 100년을 해도 늘지가 않았을 거다. 한번이라도 결과에 구체적으로 책임을 져 보면 그 다음부터 같은 실수는 없다. 드라마 연출이 얼마나 복잡한가. 모든 파트에서 그렇게 하나씩 연습해 나가면 정말 정확해진다. 이다음엔 또 나아지겠지.

글 조민준(전 <드라마틱> 편집장), 유선주(드라마 칼럼니스트) 사진제공 JTBC

▶ <밀회>의 모든 것을 담은 <맥스무비> ‘단독 인터뷰 | <밀회> 안판석 PD’ ③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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