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무비= 맥스무비취재팀 기자]
결국 그것이 스타일로 정착된 느낌이다. 스타일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사가 스타일을 결정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스타일이 두드러진다면 그건 그 작품의 어색한 부분이 스타일로 보여지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창피하다. 진짜 잘 된 작품은 스타일이 사라져야 한다. 그래서 자꾸 스타일을 지워나가려 하는데 실력이 안 돼서 남아 있는 거다.
<아내의 자격> 때는 온 몸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김희애의 연기가 거리 두기 화면의 미학을 결정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번에는 오히려 어떤 사물이나 배경에 가려졌을 때의 연기가 돋보인 느낌이다. 그것도 스타일로 느껴지지 않고 그냥 보이지 않는 듯 몰입하게 했어야 했다. 그건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 아니다. 클로즈업을 쓰면 자동적으로 크게 보이니까 유심히 볼 수밖에 없지 않나. 하지만 (허리부터 머리까지 카메라에 담는) 웨이스트 쇼트나 (무릎부터 머리까지 카메라에 담는) 니 쇼트를 쓰면 자세히 안 보인다. 자세히 안 보이는데 상황이나 신은 주의 깊게 몰입해서 봐 주기를 요구할 때. 그 몰입을 위해서 세상의 많은 화가들은 이런저런 장치를 쓴다. 렘브란트 조명도 그래서 있는 것이고. 그러니까 교묘하게 몰입을 시키고 싶은 그런 마음으로 연출한 거다. 좀 가려지면 왠지 좀 더 보고 싶어하잖나.
2회의 한 장면. 선재가 바흐의 평균율을 연주하다가 페달을 쓰지 않는 걸 혜원이 지적하는 장면이 있다. 처음에 끊어 치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했던 선재가 “음표 사이에 그러라고 써 있는 것 같다.”고 하자 혜원은 “그게 해석이지.”라고 말한다. 이 대화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장면에 대해 피아니스트 김소형 선생은 보통 다 페달을 밟고 연주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선재가 굳이 페달을 밟지 않은 이유에 방점이 있는 거다. 그 아이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상투적이지 않고 자기 생각을 가지고 대한다는 걸 작가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저 느낌 때문이 아니라 꼼꼼한 음표 분석을 통해서 끊어 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거다. 8회에서 마침내 선재와 혜원이 처음으로 육체관계를 가지는 장면의 독특한 연출은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그 장면이 참 좋았다. 원래 대본에는 어떻게 묘사 되었냐면 ‘뜨거운 열기, 방안의 사물들도 슬쩍 눈감아주는 것 같다. 이하 오디오만, 비디오는 형용불가.’라고 돼 있었다. 사물들이 슬쩍 눈감아 주는 것 같다고 되어있는 걸, 나는 마치 디즈니 만화처럼 사물들이 의인화되어있는 모습으로 상상했다. 그래서 사물들이 이렇게 훔쳐보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눈감아 주는 게 아니라 곁눈질하는 것처럼 찍었다. 따지고 보면 눈감아 준다와 곁눈질한다는 같은 모습의 다른 표현인 셈이다.
사실 사랑하는 남녀가 처음으로 관계를 맺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평소에는 화장실에서 볼일 보다가 누가 들어오기만 해도 흠칫하지 않나. 사귀는 사이라고 해서 늘 되는 것도 아니고, 알게 모르게 전 세계가 도와주는 교묘한 순간에 이루어진다. 사물들까지 도와줘야 가능한 거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그 장면은 그날의 마지막 촬영 분이었다. 배우들에게 이 장면은 우리가 알아서 찍을 테니 돌아가라고 박수 치며 보냈는데, 편집기사가 참 잘했다. 그냥 조명 설치해 놓고 무작위로 양념통, 신발, 계량기 등을 찍었다. 그런데 나중에 그림 붙여 놓은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순서대로 돼 있는 거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말 중요한 순간에 몰입해서 생각하면 결국 비슷한 결과를 낸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드라마에서 설명되지 않은 내력 중 궁금한 것은 강준형, 오혜원 부부의 전사(前史)다. 강준형이라고 해서 과거에도 지금 같은 속물은 아니었겠지만 왜 굳이 혜원은 신랑감으로 그를 선택했을까? 심지어 혜원은 20대에 이미 상류사회로의 진입이 지상과제였다고 토로했는데, 그렇다면 그에 걸맞는 상대를 찾지 않았을까? 정성주 선생은 작품 들어가기 전에 시놉시스를 굉장히 꼼꼼하고 자세하게 쓴다. 말하자면 드라마의 코어와도 같은 것이라 촬영 중에도 끊임없이 펼쳐보게 되는데, 거기에 오혜원의 과거에 대해서도 상세한 설정이 담겨 있다. 말대로 오혜원은 결혼을 상류사회 진입의 수단으로 여겼다. 하지만 재벌가의 며느리가 되기에는 그녀의 가정환경이 맞지를 않는다. 부모가 혜원의 선자리를 마련해 오는데, 하나는 졸부 집안.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 길로 가 버리면 돈은 많을지언정 아마도 뒤에서 수근거리며 멸시하는 걸 감수해야 할 것이다. 또 하나는 검사 같은 전문직. 그런데 그쪽에서는 일정 부분의 결혼 지참금을 요구했던 거다. 강준형은 그 차차선책이다. 몰락했지만 음악가 집안의 자제라 남 보기에도 그럴듯하다. ‘화보 부부’로서의 결격사유가 없는 거다. 그러니까 혜원이 준형과 결혼하게 된 것도 나름 속물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굴린 끝에 나온 결론이었던 것이다. 결말은 애초부터 그런 내용으로 염두에 두었었나? 정성주 선생이 작품을 써 내려가는 중에 머릿속에 담아둔 이미지가 몇 가지 있었다. 머리 깎인 오혜원, “겁나 섹시해요.”하는 대사. 그런 이미지와 단어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선재가 인터넷으로 만난 ‘막귀 형’의 정체가 혜원이라는 것은 끝내 밝히지 않았는데. 써먹기에 재미있는 소재다. 헌데 그건 내가 밝히지 말자고 했다. 극중에서 몇 번 들통날 뻔도 했었는데, 왠지 안 밝히고 넘어가면 좋겠더라. 순수한 시청자의 입장에서 막귀라는 인물이 참 좋았다. 왠지 의지가 되고, 정체를 모르는 선재의 입장이 돼서 한번 만나보고도 싶고. 어쩌면 인간 같지도 않은 존재들만 돌아다니는 세상에서 그나마 인간 같고. 그래서 막귀인 채로 놔두고 싶었다.
기본적으로는 그런 생각이 전제되어 있는 것 같다. 혜원은 ‘나천재’의 정체를 알지만 선재는 막귀의 정체를 모르지 않나. 그럼에도 혜원이라면 자기가 필요할 때 그걸 이용해 먹지 않을 걸 믿으니까 놔두고 싶었던 거다. 비록 혜원이 불의에 가담해 살아왔어도 그런 일말의 믿음 정도를 가질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구제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재벌가에서 마작을 한다는 설정은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었나? 지극히 편의적인 설정이다. 드라마가 시작되면 회장 일가와 그 속의 인물들에게 시선을 집중시켜야 하고, 그들의 기괴성도 부각시켜야 한다. 어떻게 하면 그것을 짧은 순간에 효과적으로 얻을 수 있을까라고 떠올린 것이 마작이다. 사람들이 별로 하지도 않는 걸 이 사람들은 의식처럼 하지 않는가. 그 모습이 그로테스크하기도 하면서 서 회장이라는 인물이 돈 풀어주는 사람이라는 것도 보여주고. 다들 그 부스러기 먹겠다고 거기 앉아 있다. 아이디어는 물론 정성주 선생이 낸 것이다. 정말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다. 집 책꽂이를 보면 별의별 책이 다 있다. 마작 책도 물론.
<밀회>는 연출, 각본, 주연배우는 물론 세계관까지, <아내의 자격>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말했다시피 <아내의 자격>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 작품은 아니다. 기껏해야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예전에는 이런 시퀀스에서 이렇게 갔으니까 이번에는 다르게 가 보자’ 정도의 인식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가공의 세계를 만드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어서 미리 이야기 구조를 생각해서 이런 주제를 다뤄 보자라고 생각하는 건 쉽지 않다. 일단 인물 한 명이 있고, 그를 움직일 첫 번째 사건. 이것만 있으면 가슴을 쓸어 내리고 시작하는 거다. 뒤의 이야기는 운명에 맡기는 건데, 막연하게 가 본다는 게 아니라 작가 내부에 있는 방향성을 따라야 한다. 그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그 내부의 방향성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진다.
글 조민준(전 <드라마틱> 편집장), 유선주(드라마 칼럼니스트) 사진제공 JTBC<밀회>의 모든 것을 담은 <맥스무비> ‘단독 인터뷰 | <밀회> 안판석 PD’ 편은 총 3부로 나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인터뷰를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 <맥스무비> 단독 인터뷰 ①| <밀회> 안판석 PD “단 한 개의 음표, 단 하나의 손동작도 틀리지 않았다.”
▶ <맥스무비> 단독 인터뷰 ②| <밀회> 안판석 PD “최고의 리얼리티가 최고의 판타지를 만든다.”